한 손엔 빨랫감, 다른 손엔 ‘정’… 그렇게 식구가 되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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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복빨래방] EP 3. 산복에 부는 여름 바람

매주 백세 실버 체조를 하고 틈틈이 소풍까지 가는 어머님들. ‘청춘’이라는 두 글자가 가장 잘 어울리는 분들입니다. 이재화 PD

안녕하세요, 산복빨래방입니다. 어느덧 여름이 성큼 다가왔습니다. 산복빨래방은 어머님, 아버님의 뜨거운 '정'으로 여름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소풍을 함께 떠나는 이웃이자, 맛있는 음식을 나눠 먹는 식구가 되어가는 중입니다.

주 2회 마을광장 ‘실버체조’
빨래방 ‘막내’ 끼워 주셨죠
그냥 오시라 해도 막무가내
손주 먹이듯 싸 들고 오시죠
김치 담그고 시래깃국 끓여
설레는 여름 소풍 떠납니다
고둥 캐러 갈래? 좋지요!
기장 바다서 재미도 캤어요


■청춘이다, 청춘이야

화요일과 토요일 오전 9시 50분이면 오렌지색 옷을 입은 어머님들이 마을 광장에 모입니다. 따가운 햇볕이 쬐는 무더운 날씨지만 30명가량이 칼같이 오와 열을 맞춰 섭니다. 마치 각자 정해진 자리가 있는 듯 자기 자리를 찾는 어머님들. 흥겨운 트로트가 울리기 시작하자 몸을 들썩이며 ‘시동’을 걸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한 시간, 호천마을에서는 백세 실버체조라는 이름으로 매주 ‘마을 댄스파티’가 열립니다.

빨래방을 열면서 가장 큰 고민 중 하나는 바로 ‘어떻게 하면 빨래방을 잘 알릴 수 있을까’였습니다. 가가호호 찾아도 가 보고, 주민설명회라는 거창한 행사를 열기도 했습니다. 그때마다 주민들은 “매주 화요일, 토요일 플랫폼(마을 광장)에 가면 된다”고 입을 모았습니다. 호기심 반, 기대 반으로 플랫폼을 찾은 저희 앞에는 주황색 옷을 맞춰 입고 음악에 몸을 흔드는 어머님들이 있었습니다. ‘젊은 사람들이 왔다’며 환호하는 분위기에 휩쓸려 호기롭게 대열에 합류했습니다. 신나는 박자에 맞춰 어머님들의 팔과 다리는 그야말로 쭉쭉 뻗어 나갔습니다. 그렇게 10곡가량 흥겨운 가락 이어지고 어머님들 얼굴에는 미소가 떠나질 않습니다. 운동 부족 탓인지, 타고난 몸치라서인지 노래 한 곡이 끝날 때마다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습니다. 하지만 평균 70대인 어머님들 앞에서 30대가 주저앉는다는 건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인 만큼 마음을 다잡아 봅니다. ‘댄스 파티’ 다음 날이면 온몸의 근육이 뻐근하고 뭉치는 기분까지 듭니다.

“내일도 올 꺼제?” “이번 주도 와야지!” 어느새 어머님들은 빨래방에 올 때마다 우리를 초대합니다. 마치 게으른 손자, 손녀들을 꼭 데려가려는 듯한 어머님들의 의지가 느껴집니다. “너무 댄데예(피곤해요), 빡세던데요(힘들던데요)”라며 괜한 투정도 부려 봅니다. 하지만 어느새 저희도 중독됐나 봅니다. 세탁기를 돌리며 ‘내 나이가 어때서’ ‘자기야’ ‘사랑의 트위스트’ 같은 트로트를 흥얼거립니다. 빨래방을 알리기 위한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시나브로 우리는 실버체조 ‘막내’가 됐습니다.



■식구의 의미

“오늘 점심은 뭐 먹노?” 어머님들의 아침 인사입니다. “밥은 먹었나?” 느지막이 빨래방을 찾는 아버님들의 오후 인사입니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운영하는 빨래방은 개업 당시 점심시간이 없었습니다. ‘어머님, 아버님이 점심시간에 오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에 그냥 빨래방에서 끼니를 해결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고객(?)들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혔습니다. “다 먹고살자고 하는 건데 밥은 편하게 먹어야 한다”는 이유였습니다. 어머님, 아버님의 ‘밥정’ 덕분에 빨래방은 공식적인 점심시간이 생겼습니다.

언젠가부터 어머님들은 양손 무겁게 빨래방을 찾습니다. 한 손에는 빨랫감, 한 손에는 봉지를 들고 옵니다. “어머님, 그게 뭡니까”하고 물을 때마다 열이면 열 모두 “별거 아니다”라고 합니다. 하지만 봉지 안에는 주전부리가 가득합니다. 괜찮다고, 그냥 오셔도 된다고 말해도 어머님, 아버님은 자꾸 먹을 걸 가져다줍니다.

빨래방에 일하면서 생전 처음 방아잎을 넣어 만든 전을 먹어 봤습니다. 쌉싸름한 방아 향이 입을 감돌며 전의 느끼함을 완벽히 감쌉니다. 부추전에는 오징어가 가득했고, 고구마 맛탕은 어머님의 ‘스윗함’이 절로 느껴졌습니다. 갓 방앗간에서 나온 절편은 뜨겁고 쫄깃쫄깃했습니다. 박카스, 소시지, 라면, 밤, 토마토, 수박, 참외, 요구르트, 바나나, 아이스크림 등 어머님들의 온정에 손자, 손녀들은 매일매일 배부른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집안에서 같이 살면서 끼니를 함께 먹는 사람을 식구라고 합니다. 손자, 손녀들 먹으라고 가져오는 어르신들의 마음에서 식구의 의미를 되새겨 봅니다.



■소풍의 설렘

어머님, 아버님에게 봄은 설렘이었습니다. 봄이 되면 삼삼오오 나들이 가고 소풍 가는 게 한 해의 낙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난 몇 년간 코로나19 탓에 설렘이란 감정은 설 자리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올해는 조금 늦게나마 설렘이 찾아왔습니다. 마을은 코로나로 봄을 제대로 즐길 수 없었지만, 뒤늦게 소풍 준비가 한창입니다.

“김치 담그고 시래깃국에 조개 넣고 끓이고 하면 되겠네.” 빨래방에 둘러앉은 어머님들의 대화를 듣다가 귀가 쫑긋해졌습니다. ‘아, 마을 잔치하는구나!’ “무슨 좋은 일 있습니까?” 모른 체 하고 물었습니다. “다음 달에 소풍 가려고”라는 뜻밖의 답이 돌아왔습니다. 직접 담근 김치와 새벽에 팔팔 끓인 시래깃국에 밥이 소풍 출발 날 아침 식사입니다. 떡이나 빵은 밥도 아니라며 손사래를 칩니다. 소풍은 가는데 40인분의 시래깃국을 끓이고 김치를 새로 담그는 게 어렵지 않은 게 바로 어머님들입니다. 대화가 이어지는 동안 빨래방에는 웃음꽃이 떠나질 않았습니다. 나이를 떠나 소풍이라는 단어는 사람을 참 두근거리게 하는 것 같습니다.

어머니들의 소풍 장소는 다양합니다. 여수 바다, 남해 다도해 같은 경치 좋은 곳부터 최근 핫플레이스로 떠오른 청와대까지 동서남북을 가리지 않습니다. 많은 코스 중에서도 빨래방 단골 영희 어머님의 소풍 코스가 가장 눈길을 끌었습니다. 어머님은 부산 기장 바다에 친구들과 고둥을 캐러 갈 계획을 슬쩍 이야기했습니다. 호기심에 덜컥 같이 가도 되겠느냐 물었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여름 소풍은 기장 바다 고둥 사냥이 됐습니다.



■고둥 사냥

부산 기장군 국립수산과학원 뒤편에 차가 도착하자 넓은 바다가 우리를 맞았습니다. ‘여기 고둥이 어딨지?’ 싶은 순간 어머님들은 일단 앉아 보라며 우리에게 숟가락과 젓가락을 건넵니다. 출발 전 도시락을 준비해야 하는지 묻자 그냥 오라고 한 데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어머님들은 각자 가져온 고사리, 콩나물, 애호박, 도토리묵에 밥을 실컷 넣고 알루미늄 다라이(‘대야’의 일본말)에 비볐습니다. 바위에 쭈그리고 앉아 먹었지만 반짝이는 기장 바다는 호텔 뷰 부럽지 않았습니다. ‘더 묵어라. 그거 먹고 고둥이나 캐겠나?’ 비빔밥 두 그릇에 배가 터질 것 같았지만, 어머님들이 싸 온 음식은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베트남 커피 두 잔까지 마신 뒤에야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마치 전쟁에 나서듯 비장한 표정으로 장갑을 낀 어머님들. 바위 사이를 능숙하게 누비며 손에 든 비닐봉지에 고둥을 담기 시작했습니다. ‘여~ 봐라!’ 큰 돌멩이를 뒤집자 숨어 있던 고둥이 수북이 등장합니다. “제가 함 떼 볼랍니다!” 호기롭게 고둥을 떼 보려고 했지만, 꿈쩍 않는 녀석들. 한참의 씨름 끝에 첫 수확을 할 수 있었답니다. 열심히 캔 고둥은 모두 어머님들께 드렸습니다. 정작 큰 도움이 안 된 것 같은 느낌은 착각이겠죠?

고맙다는 말, 먹을 것 하나라도 더 챙겨 주려는 마음, 함께 가자고 손 내밀어주는 따뜻함까지. 처음에 다소 낯설기도 했지만 어머님, 아버님의 마음을 우리는 도시에서는 쉽게 느끼기 어려운 ‘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받는 것보다 주는 기쁨, 혼자보다 함께하는 즐거움의 재미를 만끽하고 있는 요즘입니다.

김준용·이상배 기자·김보경·이재화 PD jundragon@busan.com

※본 취재는 부산광역시 지역신문발전지원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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