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만나 더 아름다운… 불쑥 찾아온 낯선 인연들… [산복빨래방] EP 4.

김준용 기자 jundragon@busan.com , 이상배 기자 sangbae@busan.com , 김보경 harufor@busan.com , 이재화 jhle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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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복빨래방] EP.4 뜻밖의 손님

빨래방 공사 중 발견된 ‘산복이’. 한 달여 치료 끝에 건강한 모습을 되찾았다. 빨래방 공사 중 발견된 ‘산복이’. 한 달여 치료 끝에 건강한 모습을 되찾았다.

산복빨래방이 지난 9일로 개업 한 달을 맞았습니다. 빨래방에는 따뜻한 어머님, 무심한 듯 다정한 아버님들뿐 아니라 ‘뜻밖의 손님’들 발길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저마다 빨래방을 찾은 이유는 달랐지만 전혀 예상치 못한 손님의 방문은 우리에게도 빨래방 운영의 묘미를 선사했습니다.


빨래방 공사하다 구한 길고양이

죽음 목전서 곡절 끝에 건강 회복

산복도로 여행 온 싱가포르 관광객

길 헤매다 만난 빨래방에 엄지 척

“빨래방으로 출근하는 기자 있다”

서일본신문 보도에 한바탕 웃음


우연히 찾아온 ‘뜻밖의 손님’들의 기억에 산복빨래방이 좋은 기억으로 남기를 바라본다. 위에서부터 공사 중 발견된 고양이 ‘산복이’, 길을 잃고 빨래방을 찾은 싱가포르 관광객 리슈 씨. 김준용 기자 우연히 찾아온 ‘뜻밖의 손님’들의 기억에 산복빨래방이 좋은 기억으로 남기를 바라본다. 위에서부터 공사 중 발견된 고양이 ‘산복이’, 길을 잃고 빨래방을 찾은 싱가포르 관광객 리슈 씨. 김준용 기자

■‘야옹이’ 손님

도심과 조금 떨어진 호천마을에서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동물이 있습니다. 바로 고양이입니다. 산복도로는 경사가 매우 가팔라 앞집 옥상이 뒷집 마당과 바짝 붙어 있습니다. 구석구석 마을 고샅길이 많지만 주민 수가 적어 인적은 드뭅니다. 여러모로 고양이가 살기 좋은 환경인 셈입니다.

빨래방에도 빨래방 공사 때부터 희로애락을 함께한 고양이 손님이 있습니다. 지난달 빨래방 개업을 앞두고 리모델링 공사가 한창이던 때였습니다. 빨래방 문과 2층 계단 사이 아주 작은 공간에서 갑자기 뭔가 ‘툭’ 하고 떨어졌습니다. 검고 흰 얼룩무늬 고양이였습니다. 진물과 진드기 탓에 눈조차 제대로 뜨지 못하고, 한참 굶은 듯 몸은 앙상했습니다. 어디선가 다친 듯한 목에는 구더기마저 득실거렸습니다. 이 녀석은 비틀거리며 건물 구석에 몸을 말아 눕고 가쁜 숨만 겨우 내쉬었습니다. 서둘러 구조에 나섰습니다. 사람을 경계하는 게 당연한 길고양이인데도, 저항할 힘조차 없는 듯 몸을 만지는 데도 전혀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차라리 잔뜩 경계해 줬으면’ 싶어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급히 데리고 간 동물병원에서는 입원을 위해 고양이 이름을 묻더군요. 저도 모르게 ‘산복이’라고 답했습니다. 산복도로에서 만난, 귀한 ‘묘연’이니까요. 수의사 선생님은 “오늘 입원하지 않았으면 당장 내일 고양이별로 떠났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라며 “산복이가 수술 후에도 일주일을 버틸 수 있을 지 장담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꼭 낫길 바랐던 빨래방 식구들의 간절한 기도가 하늘에 닿은 걸까요. 다행히 수술 후, 산복이 상태는 빠르게 회복됐습니다. 구조 당시 1.3kg에 불과했던 몸무게는 2주 만에 곱절로 늘었습니다. 구더기가 끓던 목 상처도 아물고, 진물이 굳어 보이지 않던 눈동자도 총명한 에메랄드빛을 되찾았습니다. 정상 수치의 15배를 넘어서던 염증 수치도 가라앉았습니다.

산복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회복해 갔지만, 미뤄 뒀던 중요한 문제에 걱정은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산복이의 거처 문제입니다. 빨래방이라는 공간 특성상 실내에 고양이를 키울 수는 없는 노릇. 빨래하러 오는 주민들이 불편할 수 있다는 현실적인 문제도 외면하기 어려웠습니다. 동물병원 도움으로 중성화 수술(TNR)을 마친 뒤 새 주인을 찾기 위해 공고를 냈지만 안타깝게도 성과는 없었습니다.

빨래방 식구들은 관련 지침 조사와 전문가 자문을 거쳐 회의를 반복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고민 끝에 산복이를 구조 장소에 놓아 주기로 했습니다. 산복이가 건강히 자립할 수 있도록 ‘제자리 방사’를 한다는 뜻입니다. 농림축산식품부가 고시한 고양이 중성화사업 실시요령에도 ‘방사할 때는 포획한 장소에 방사해야 한다’고 명시돼 있는 점도 참고했습니다.

다행히 산복이는 마을에 돌아간 뒤에도 건강한 모습으로 빨래방 근처에서 자주 보이고 있습니다. 가끔 빨래방 건물 안까지 들어와 배를 보이게 드러눕고는 ‘그릉그릉’ 기분 좋은 소리를 낸답니다. 산복이를 위해 빨래방에는 사료도 구비해 놓았습니다. 산복이와 더불어, 이곳에는 많은 고양이가 이웃처럼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산복빨래방을 취재한 서일본신문 히라바루 나오코(오른쪽) 기자. 김준용 기자 산복빨래방을 취재한 서일본신문 히라바루 나오코(오른쪽) 기자. 김준용 기자

■외국인 손님

평균 나이 70대가 넘는 호천마을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존재가 고양이라면, 정말 보기 힘든 귀한 손님도 있습니다. 바로 젊은 사람입니다. 그나마 다른 산복도로와 비교하면 호천마을에는 젊은이들 보기가 그나마 수월한 편입니다. 젊은 관광객이 사시사철 마을을 찾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대부분 어머님, 아버님들이 활동하시지 않는 밤에 마을을 찾습니다. 사실상 어머님, 아버님이 직접 이야기 나누고 함께 지내는 젊은 사람은 빨래방 식구들이 유일합니다.

어느날이었습니다. 점심시간이 지났을 즈음 한 젊은 여성이 빨래방 앞을 기웃거렸습니다. 너무 깜짝 놀라 반갑게 “안녕하세요!” 하고 크게 외쳤습니다. 그 뒤 몇 초간의 정적. 순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짧은 영어가 튀어나왔습니다. “캔 유 스픽 잉글리쉬?” 맞았습니다. 그녀는 외국인이었습니다. 빨래방에 찾아온 첫 외국인 손님. 마을 대표 관광지인 드라마 ‘쌈 마이웨이’ 촬영지인 남일바를 찾다가 오게 됐다고 합니다. 남일바는 빨래방과 300m정도 떨어져 있는 곳인데 단단히 길을 잘못 든 것 같았습니다. 골목에 위치한 빨래방에 적잖이 놀라고 즐거워하는 눈치였습니다.

싱가포르에서 온 관광객 리슈 씨. 리슈 씨에게 어렵사리 빨래방의 취지를 설명했습니다. 뭐라도 대접하고 싶어서 ‘K 커피’라며 커피 믹스도 건넸습니다. 그녀는 부산 관광을 왔고 감천문화마을, 호천문화마을 같은 부산의 산복도로를 여행하고 있었습니다. 전 세계 어디에도 없는 풍경이라고 극찬합니다. 서로 정확한 의사소통을 할 수는 없었지만 마을을 찾아준 외국인이 반가웠습니다. 마을 주민 1개월차의 어설픈 솜씨로 빨래방 옥상에서 마을 자랑을 늘어놨습니다. 우리도 그녀가 신기했지만 이 산골마을에 빨래방을 연 우리도 그녀에게는 신기했던 것 같습니다.

지난달 30일 규슈 서일본신문 4면에 게재된 산복빨래방 이야기. ‘빨래방으로 출근하는 기자들이 있다’라는 첫 문장이 인상적이다. 지난달 30일 규슈 서일본신문 4면에 게재된 산복빨래방 이야기. ‘빨래방으로 출근하는 기자들이 있다’라는 첫 문장이 인상적이다.

우리에게 유튜브 주소를 물어보고 구독 버튼을 누른 뒤 그녀는 원래 목적지인 남일바로 향했습니다. 한국 드라마를 좋아한다던 리슈 씨가 찾던 드라마 속 배우 박서준은 없었지만 부산, 그리고 산복빨래방이 좋은 기억으로 남았으면 합니다.

빨래방을 찾아온 일본인도 있습니다. 규슈 서일본신문의 히라바루 나오코 기자. 한 달에 한 번 전하는 부산 소식 지면에 산복빨래방이 첫 주인공이 됐습니다. 히라바루 기자는 한국전쟁 이후 조성된 산복도로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한국의 역사, 빨래방을 열게 된 계기에 대해 자세히 묻기도 했습니다.

히라바루 기자가 다녀간 며칠 뒤 ‘빨래방으로 출근하는 기자가 있다’라고 시작하는 기사가 서일본신문에 게재됐습니다. 빨래방을 찾는 어머님, 아버님들은 서일본신문 지면을 보고 “빨래방 덕분에 일본 신문에도 나와보네. 세상 오래 살 일이다” 하며 웃음 지었습니다.

지난 한 달 간, 마을에 불쑥 찾아온 산복빨래방이 반가운 손님, 좋은 손님으로 기억되면 좋겠습니다. 신문사에서 온 젊은 손님들이 마을에서 편하게 지낼 수 있도록 항상 배려해 주는 어머님, 아버님의 마음을 다시 한번 기억해 봅니다.


※본 취재는 부산광역시 지역신문발전지원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김준용 기자 jundragon@busan.com , 이상배 기자 sangbae@busan.com , 김보경 harufor@busan.com , 이재화 jhle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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