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희와 함께 읽는 우리시대 문화풍경]한국전쟁기 부산, 전시작곡가협회와 이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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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대 대학원 예술·문화와 영상매체협동과정 강사

해방기 트루먼 대통령의 특사 폴리는 한국을 “이데올로기의 전장”이라 규정했다. 이데올로기가 사회를 포위하고 냉전논리가 세계를 지배하는 가운데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1951년 1월 붓을 총으로 바꾸어 결전구국문화인대회가 열렸다. “위급존망의 관두(關頭)에 선 조국 수호의 단호한 결의”를 표명한 것은 제갈량의 출병을 연상할 만큼 결연하다. 반공주의를 강화하고 애국심을 고취하는 데 문화예술인도 궐연히 동참했다.

이 무렵 부산에서 전시작곡가협회가 조직됐다. 동요부터 교향곡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작품 활동을 전개하되 “국민을 위한 노래”의 작곡과 보급에 주력하고자 했다. 종군활동에도 관심을 두었다. 전쟁의 경험을 선율에 담으려 한 것이다. 이상근은 동부전선을 종군한 유치환의 시를 바탕으로 칸타타 를 작곡했다. 전시문화론의 핵심과제는 국민만들기(Nation-building)였다.

전시작곡가협회의 첫 작품발표회는 ‘가곡의 밤’으로 꾸렸다. 1951년 7월 7일 남선여중(현 남성여고) 음악실에서 열렸다. 설창수 시·장수철 작곡 , 김춘수 시·이상근 작곡 , 홍두표 시·김대현 작곡 , 설창수 시·박재훈 작곡 , 유치환 시·윤이상 작곡 등이 주요 프로그램이다. 반공과 선무, 위문담론이 지배적이다. 이 무대는 결전예술의 장이자 피란음악인들이 결집한 교류와 화합의 자리이기도 했다. 이상근, 윤이상, 설창수, 김춘수, 홍두표, 유치환은 부산·경남을 기반으로 활동한 작곡가와 문인들이다. 해군정훈음악대 소속의 피아니스트 백낙호, 성악가 이인범, 김천애, 손윤열이 출연했다. 1950년 10월 결성된 해군정훈음악대가 부산에 주둔하던 시기였다.

이상근은 윤이상의 후임으로 1953년 부산고에 부임하여 2000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줄곧 부산에서 활동했다. 전중기 피란예술인들과의 교류는 부산음악이 지역을 넘어 한국사회 전체로 확장할 수 있는 계기였다. 부산은 이상근에게 삶터이자 일터였으며, 찬연한 예술혼을 꽃피운 음악적 대지였다.

지난해 부산문화재단에서 갈무리한 이상근 음악사료는 악보 100건, 팸플릿 379건 등 1,345건에 이른다. 사료는 예술가를 현양하거나 지역의 문화자본으로 활용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지역문화사 연구의 마중물이자 지역문화의 가치를 담지한 깊은 우물이다. 지난해 부산근현대역사관 개관준비팀에서는 부산 출신 대중음악 작곡가 백영호 사료를 기증받았다고 한다. 결코 녹록지 않은 일이다. 적지 않은 정성과 노력의 결실이 아닐 수 없다. 이상근 사료에도 각별한 관심이 절실하다. 부산음악의 오롯한 실체이기 때문이다. 이상근 사료가 아니라면 피란수도 부산의 예술풍경을 어떻게 그릴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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