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희와 함께 읽는 우리 시대 문화풍경] 무훈의 동반자, 피란수도 부산의 정훈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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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대 대학원 예술·문화와 영상매체협동과정 강사

우리나라에 서양음악이 들어온 경로의 하나로 양악대 창설을 들 수 있다. 신식 군대 별기군에는 서양식 신호나팔수 동호수(銅號手)를 두었다. 이를 바탕으로 1896년 곡호대(曲號隊)를 설치했다. 소고와 나팔로 편성하여 군악대라 보기는 어렵지만 군악대의 개념과 존재를 확산하는 디딤돌을 놓았다. 정식으로 군악대를 설립한 해는 1900년이다. 화려한 복장에다 금빛 은빛으로 번쩍이는 서양 관악기와 타악기로 구성한 군악대는 대한제국의 위용을 보여주는 상징이었다. 강원도의 금광을 내주고 악기를 들여왔다 하니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대한제국 군악대 창설은 열강의 각축 속에서 나라의 위신을 세우려는 눈물겨운 몸부림이라 해도 좋다.

대한민국 군악대의 역사는 창군과 맥락을 같이한다. 해방 직후 창설한 남조선국방경비대(육군 전신)와 해방병단(해군 전신)은 1946년 미군정 산하 통위부 조선경비대와 조선해안경비대로 편제된다. 이 무렵부터 군악대를 운영했다. 조선경비대에서는 군악대 11개를 운영했다. 단정 수립 후 육군본부군악대와 해군본부군악대로 안착하였으며, 각각 군악학교를 설립했다. 군악대 활동은 한국의 정치상황이나 국제사회의 냉전논리와 무관하지 않다. 특히 사상전이었던 한국전쟁기에는 문화전선 구축에 적극적으로 동원되었다. 대적 선무공작, 군경과 국민의 사기 진작, 위무가 군악대의 주요 임무였다. 군악대는 무력보다 더 큰 전과를 거두게 하는 ‘군수품’으로 인식되기도 했다.

전시 피란수도 부산에서는 정훈음악 활동이 두드러졌다. 연주력은 곧 사상전·심리전에서 승리하기 위한 전투력 그 자체였다. 1950년 10월 창단한 해군정훈음악대는 유엔군과 외빈을 대상으로 한국의 문화수준을 선양하는 임무에 주력했다. 주둔지는 부평동 아사히(朝日) 여관이었다. 육군군악학교는 부평동 수산시장, 초량유치원, 철도관리사무소, 성남국민학교에 주둔했다. 국방부 소속으로 대구에서 활동하던 한국교향악단이 해산하면서 육군교향악단이 결성되었다. 부산관현악단도 가세했다. 전후 지역에서 가장 먼저 시립교향악단을 설립한 도시가 부산이라는 사실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어느덧 한국전쟁 72주년을 맞는다. 한국전쟁기 음악 활동은 군의 후원과 보호에 기댄 바 크다. 음악은 탄환이자 무훈(武勳)의 동반자였다. 한국전쟁이 “이념과 이념과의 투쟁이요, 상용(相容)될 수 없는 사상의 싸움”이었던 만큼, 음악은 반공주의와 애국주의, 민주주의 이념을 관철시키는 통로이기도 했다. 포연이 사라진 뒤에도 국가가 예술을 통제하거나 이용하는 문화정치의 논리는 견고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예술은 국가주의의 자장 안에서 나팔을 울리고 있지는 않은가. 곡호대의 신호가 어디로 향하는지 눈여겨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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