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훈의 생각의 기척] 70줄에 시 쓰기에 도전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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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철학자

70줄에 접어든 그로부터 시 14편을 건네받았다. 그는 겸손하게도 ‘습작시’라 불렀지만 내가 보기에는 만만찮은 시들이다. 이런 밉지 않은 기습으로부터 소크라테스가 강렬하게 떠오르는 건 필연적이었다. 그 나이에 시작(詩作)에 도전한다는 건 결코 한가로운 소일거리가 아니니까.

소크라테스가 감방에서 처형을 기다리며 한 일 역시 소일거리가 아니었다. 그는 감방에서 이솝의 우화를 읽고, 처음으로 시작에 도전한다. 그때 그의 나이 71세였다. 사형을 앞둔 그의 처지와 사정을 고려한다 해도 그런 노령에 시작에 착수하는 건 측은지심보다 경이로움을 불러일으키는 도전이라 아니 할 수 없다. 대부분의 경우 시인이라는 멋들어진 장식적 칭호를 하나 더 달고 싶어 하는 허영심이 출발점이라는 사실에 눈을 감지 않는다면 말이다.

만년 들어 생물학적 소멸에 휩쓸리지 않고
정신의 단련에 더욱 매진하는 귀중한 개인들
그나마 이들의 마지막 불꽃에 힘입어
인류는 미망에 들지 않고 한 걸음씩 나아가


허나 노년의 삶이 모두 아름다운 건 아니다. 안된 얘기지만, 인생의 말년에 이와는 정반대되는 삶의 양식을 보여 주는 사람들도 있다. 이른바 태극기부대 소속의 노병들은 후세가 자신을 어떻게 기록할지 안중에 없는 듯하다. 그래서인지 가공된 거짓 분노만 드러내는 자신의 추한 모습에 부끄러움을 느낄 새도 없는 것 같다. 기회만 되면 광화문광장에 태극기뿐만 아니라 미국 국기와 이스라엘 국기마저 들고 모여드는 건 현대사를 살아온 대한민국 노인들의 필연적인 사고의 귀결, 그러니까 사유의 자연사(natural history) 같은 것일까, 아니면 비판의식이라는 백신이 없으면 걸릴 수밖에 없는 정신의 풍토병 같은 것일까? 이 물음은 현실적 절박성을 가지면서 동시에 심리적 안타까움도 담고 있다.

홀로코스트(히브리어로는 ‘쇼아’) 이후 유대-기독교 문명은 자기네 신에 대한 엄격한 재고찰에 들어갔다. 600만 명의 무고한 유대인이 한 줌의 재로 바뀌는 동안, 자신을 향한 그 애타는 절규와 외침에 아무런 응답을 하지 않은 신. 그 신은 침묵과 방관의 모습으로 결국 가해자 편을 들었던 것이다. 그런 연후에 그 신을 그대로, 마치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는 듯 계속해서 섬기는 일이 가당키나 한 일인가! 태극기부대원들의 손에 휘날리는 이스라엘 국기는 아무런 생각이 없다는 것, 이들의 무지막지가 거의 반문명적, 반인류적 수준에 가 있다는 것을 웅변한다. 그들에게 그냥 짧은 세계사 한 권이라도, 그게 힘들다면 구약성경 신명기 32장만이라도 읽어 보기를 권한다.

요즘 들어, ‘아우슈비츠 이후 시를 쓰는 건 야만’(아도르노)이나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브레히트) 등의 무거운 경고에도 불구하고 시 쓰기에 도전하는 경쾌한 사람들이 하나둘 나타나고 있다. 이런 현상을 두고 마냥 기뻐할 일만은 아니라는 의심이 드는 건 가짜가 진짜를 대신하고 제사보다 젯밥에 관심이 가 있는 경우가 빈번하기 때문이다. 그러해도 시를 써야 하는 나름의 절박함이 있을 것이다. 나로서는 그 절박함이 사적이기보다는 역사적, 사회적, 문명적 계기로부터 비롯되었으면 더 좋겠다는 생각을 추가로 해 보기는 한다.

소파에 반쯤 누워 아이스크림을 파먹듯 자기 내면의 주관 세계를 규칙적으로 분비하는, 편하기 짝이 없는 시인들보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세상을 의식하며 긴급한 심정으로 피 토하듯 시를 캐내기 시작한 만년의 그가 존경스럽다. 아름다운 지각, 밉지 않은 서두름이라는 것도 있다. 시가 젊은 날의 불꽃처럼 피어오르는 영감의 산물이라 주장하는 사람은 시작에 관한 한 반쪽짜리 진실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세상과 온갖 접촉을 경험한 바 있는 원숙한 사람은 만년(晩年)의 작품을 생산하는 것이다. 베토벤의 마지막 5곡의 피아노 소나타 같은, 혹은 괴테의 과 같은(개인적으로 불만이 없는 건 아니다. 시에 반(反)하는 수상한 시절에 시인이라는 장식을 하나 더 추가하기보다 시를 쓰겠다고 결심한 그에게 기왕이면 사랑시의 뮤즈 ‘에라토’보다 서사시의 뮤즈 ‘칼리오페’가 강림하면 더 좋지 않겠는가 하는).

이렇게 만년에 접어들면, 나약하게 사그라들기보다 정신을 번쩍 차리는 사람들이 있다. 정신이 있는 듯 없는 듯 생물학적 삶만 무의미하게 연장하거나 지독한 해악을 사방에 끼치고 사는 여타의 수많은 사람과는 다르게 말이다. 이들이 바로 에드워드 사이드가 말한 바 있는 ‘만년(晩年)의 양식’을 성취해 내는 사람들인 바, 이들이 불태우는 마지막 불꽃 덕분에 인류가 미망이나 무의미나 야만의 상태에 빠지지 않고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들이야말로 인간이 쓸데없고 형편없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 그래도 이 지구상에 살아갈 만한 가치와 자격이 있다는 걸 증명하는 귀중한 개인들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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