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장산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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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령스러운 산의 머리(꼭대기)는 하늘의 기운이 닿는 곳이라 사람들은 거기서 제(祭)를 올리며 풍요와 안녕을 기원한다. 그 제를 올리는 시설이 제천단(祭天壇)이다. 우리나라에 제천단이 있는 산은 몇 안 된다. ‘참성단’이 있는 마니산, ‘천제단’이 있는 태백산 정도다. 그런데 부산 해운대 장산에 ‘천제단’이 있어 지금도 해마다 두 차례 하늘에 제사를 올린다. 부산에서 가장 큰 산이라는 금정산에도 제천단은 없다.

장산에는 또 ‘마고당’이 있다. 마고할미를 모신 신당이다. 마고는 그리스 신화의 가이아에 해당하는 우리나라의 창세신이다. 혼돈의 상태에서 하늘과 땅, 산과 강을 만들었다. ‘마고당’에서도 매년 6월 만민의 무사태평을 기원하는 제사가 치러진다.

요컨대 장산은 재난을 진압하고 사람을 보호해 주는 신격체이자 하늘과 교감하고 창세신을 접하는 신성한 공간인 것이다. 그렇다면 장산이야말로 부산의 진정한 진산(鎭山)이자 성산(聖山)인 셈이다.

‘아득한 옛날, 장산의 한 마을에 고선옥이라는 처녀가 살았다. 어느 날 무지개를 타고 선인(仙人)이 내려와 고선옥에게 물을 청했다. 옥처럼 빛나는 고선옥의 모습에 매혹된 선인은 청혼했고, 둘은 아들 열 딸 열을 낳았다. 선인은 나라를 일궈 60여 년 간 다스리다 하늘로 돌아갔다. 이후 고선옥은 자식들과 함께 나라를 이끌다 마침내 선인을 따라 하늘로 떠났다.’

장산에 전해오는 설화를 간추린 내용인데, 이쯤이면 그대로 천손강림(天孫降臨)의 건국신화다. 고조선, 부여, 고구려, 신라, 가야의 건국신화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부산에 이런 건국신화를 전하는 곳은 현재까지 장산 외에 달리 없다. 선인과 고선옥이 다스렸다는 나라는 삼한시대의 장산국일 테다. 옛 문헌의 고증이 정밀하지 않은 탓에 거칠산국, 내산국 등과 함께 혼용되기도 하고 동래 지역을 지칭하는 것으로 알려진 때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장산국은 장산을 중심으로 존재했을 것이 유력하다. 그렇게 본다면 부산의 뿌리는 다른 데가 아닌 해운대 일원으로 봐야 할 것이다.

이처럼 부산의 진산이자 성소인 장산이 지난 28일 온전히 개방됐다. 한국전쟁 이후 장산 정상이 군사시설 지역으로 묶여 민간인의 출입이 통제됐는데 70여 년 만에 비로소 일반인의 자유로운 출입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부산 사람들로서는 자신의 정체성과 자존심을 새롭게 깨달을 수 있는 기회와 공간을 비로소 되찾게 됐다. 참으로 잘된 일이다. 임광명 논설위원 kmyim@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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