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두의 용광로엔 똥파리, 얼씬도 못 한다”

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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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법 스님의 신심명 강의 / 도법

“깨달음이 저 멀리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화두 드는 행위 그 자체에 있다”고 말하는 도법 스님. 부산일보DB “깨달음이 저 멀리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화두 드는 행위 그 자체에 있다”고 말하는 도법 스님. 부산일보DB

쉽다. 그런데 어마어마하다. 〈도법 스님의 신심명 강의〉가 그렇다. 〈신심명(信心銘)〉은 달마 대사의 손 제자인 중국 선종의 3조 승찬(?~606) 대사가 선의 요체를 알기 쉽게 게송으로 풀어쓴 것이다. 146구 584자로 짧다.

도법 스님의 얘기는 색다르고 명확하다. “붓다는 위대한 상식의 발견자, 라는 것이 내가 정리한 관점이다.” 그 ‘위대한 상식’은 기존의 생각과 많이 다르다. 깨달음은 무시무시하게 높고 먼 곳에 따로 있다는 게 아니라 화두 참선의 순간에 있다는 것이다.


중국 선종 3조 승찬의 ‘신심명’ 이해

“깨달음은 화두 드는 그 자체에 있다”

화두는 선악·시비 녹여 버리는 용광로

어떤 ‘분별 망상’도 발붙이지 못해


그의 서두는 이렇다. “일타 성철 자운 구산 서옹 서암 혜암 법전 지관 법정 우룡 각성 스님, 선후배 도반들, 그리고 이 경전 저 경전, 이 어록 저 어록, 이 법문 저 법문은 불법은 너무 심오하므로 확철대오해야만 알 수 있다”고 했다는 거다. 특히 성철 스님은 “확철대오하지 않으면 그 어떤 앎도, 그 어떤 역할도 다 소용없다”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얘기했다는 거다. 그러나 도법 스님은 “돈오돈수 확철대오는 다음 생으로 미루어 놓고 지금 바로 여래의 진실한 뜻에 일치하는 불교, ‘바로 이해, 실현, 증명’되는 불교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확철대오라는 허수아비 호랑이 앞에서 벌벌 떨었던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이 한없이 초라하고 서글펐다”고 그는 말한다.

과연 그는 간화선을 매우 다르게 말한다. 근본적 간화선주의자 같다. 간화선은 깨닫기 위해서거나, 부처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거다. 화두를 드는 행위 자체가 목적이라는 거다. 번뇌망상이 떨어져 나간 그 자리 그 상태가 해탈이고 열반이라면 화두를 잘 들고 있으면 바로 그것이 ‘소를 타고 있는 것’ ‘본래부처’의 상태라는 거다. 반복하자면, 깨달음이 저 멀리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화두 드는 행위 그 자체에 있다는 거다. 간화선의 행위 자체가 더 구할 마음도, 얻을 마음도 없는 무소구행(無所求行) 무소득행(無所得行)이라는 거다.

그는 “화두는 용광로”라고 말한다. 모든 것을 한순간에 녹여버리는 것이 용광로이고 화두다. 대승도, 선불교도, 초기불교도, 교학불교도, 나아가 유무도, 이쪽과 저쪽도, 탐진치 삼독도, 억만 겁의 죄업도, 선악 시비도, 그 모든 양극단을 녹여버린다. 그는 “붓다가 누구인가”라며 “일생을 양변, 양극단에 빠지지 않는 길인 중도행(中道行)을 살아간 사람이다. 화두를 드는 것 자체가 중도행”이라고 했다. 그는 또 똥파리를 말했다. 이놈이 부처님 머리에도 가고, 임금님 얼굴에도 가고, 안 가는 데가 없다. 그런데 용광로에는 얼씬 못한다. 그 어떤 ‘분별망상’도 화두의 용광로에는 발붙이지 못한다는 거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모든 화두가 용광로가 되는 건 아니라는 거다. 끊임없이 간절한 마음으로 챙길 때 화두는 용광로로 작동하는 거다. 순간순간마다 번뇌망상의 똥파리가 얼씬도 못하는 것이 화두의 용광로다. 그는 “간화선은 팔만사천법문을 녹여내는 용광로”라고 말한다.

간화선 3대 체계가 있단다. 첫 번째가 대신심(大信心)이다. 자신의 참모습이 본래부처라는 확신을 갖고 화두 수행을 하면 그 자체가 깨달음의 수행, 본래붓다의 행이 된다는 확신이 그것이다. 본래부처는 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즉각 드러나는 실천 주체로 인격화돼야 한다는 거다. 두 번째는 대분지(大憤志)다. 이것도 극기훈련하듯 하는 장좌불와나 용맹정진이 아니다. 그 극단적 방식과는 정반대로 중도의 팔정도, 즉 정신 바짝 차리고 매 순간순간 차분하게, 침착하게, 치밀하게, 평온하게, 지속적으로, 줄기차게, 성실하게, 끊임없이 하는 것이 진정한 대분지라고 한다. 세 번째 대의정(大疑情)도 마찬가지다. 뼛속 깊이 사무치게끔 화두를 크게(大), 즉 끊임없이 붙잡는 것이다.

‘지극한 진리는 어려울 것이 없네. 오직 분리하여 가려냄을 꺼려할 뿐. 미움 좋음 하는 차별심이 없으면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처럼 무사태평이네.’ 신심명의 첫 게송인데 여기서 모든 것이 끝난다는 거다.

도법 스님은 말한다. “어떤 멋진 길도 스스로 걸어야 내 길이 된다.” 부처가 말했다. 처음 태어날 때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했고 마지막에는 ‘법등명 자등명(法燈明 自燈明)’이라고 했다. 자기 스스로 길을 가야 한다는 거다. ‘지극한 진리는 어려울 것이 없다.’ 이것이 도법 스님이 〈신심명〉을 통해 전하는 일구(一句)다. 도법 지음/불광출판사/296쪽/1만 7000원.


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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