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로365] 위기의 한국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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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원 폴리컴 대표

적어도 1987년 대통령 직선제 이후 우리 정치가 한시도 평온했던 적은 없었다. 여야 대치는 일상이었고, 국회엔 해머, 전기톱에 최루탄까지 터졌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자구 노력으로 ‘국회선진화법’이 만들어졌다. 국회 상임위도 비교적 여야 간 고르게 나눠 가졌고, 법사위원장을 야당에 양보하는 좋은 규범도 지켜졌다. 그런데 요즘 들어 과도한 정쟁을 막으려는 정치적 노력은 사라지고 극단적 대립이 지속되면서 정치가 파국을 맞고 있다.

대통령 탄핵 이후 여야 간 균형이 깨어지고 정치규범이 와해하면서 위기가 시작됐다. 18대 국회 이후 ‘법사위원장은 야당 몫’이던 관례가 파기되고, 의석수와 상관없이 나눠 갖던 상임위원장도 여당이 18개 전체를 독식했다. 비례대표 위성정당이라는 코미디 같은 일도 벌어졌고, 지난 총선 땐 기호 1번을 확보하기 위해 ‘의원 꿔주기’도 벌어졌고, ‘검수완박법’ 안건 조정을 위해 위장 탈당까지 감행하는 일도 있었다.


위성정당, 검수완박, 법사위 사태 등

정치 격변에 민심도 매우 거칠어져

유권자는 진영화·팬덤화로 분열


선거는 인기투표화 하는 양상도

민생과 국익 보호에 대응 어려워

정치권 전체 통찰적 지혜 필요


이 모든 일이 문재인 정권 5년간 벌어진 일이지만, 정치규범 와해는 지금도 진행형이다. 대선 후보가 낙선한 지 두 달도 안 돼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하는 생경한 풍경이 연출되었고, 정치 경험이 전무한 26세 여성이 공당의 비대위원장이 됐다. 급기야 여당 대표는 6개월 당원 정지 중징계를 받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군사정권 시절에도 보지 못했던 일련의 사태들을 새로운 정치를 위한 생산적 파괴로 받아들여야 할지, 아니면 퇴보로 해석해야 할지 당혹스럽기까지 하다.

깊어진 진영화로 인한 국민 분열은 정치 위기를 가속화하고 있다. 정치를 지탱하는 건 시민이다. 대표를 뽑는 유권자 시민, 권력을 견제하는 감시자 시민, 적극적으로 정치에 개입하는 참여 시민이 있어야 정치가 지속된다. 우리 국민의 정치에 대한 관심과 열정은 이미 정평이 나 있다. 문제는 열정의 과잉화다. 유권자 시민은 감정적으로 변했고, 감시자 시민은 진영화, 참여 시민은 팬덤화됐다.

2018년 더불어민주당은 대구·경북을 제외한 전국의 광역단체장과 의회를 싹쓸이하다시피 했다. 하지만 2022년 지방선거에선 경기도만 균형을 이뤘을 뿐 극단적으로 상반된 결과가 나왔다. 2020년 21대 총선에서도 특정 정당이 지역구와 비례 위성정당을 합해 180석을 석권했다. 어느 정도 균형을 이뤘던 과거 양상과 달리 선거 결과가 극단적으로 변한 건 분노한 유권자의 감정이 반영된 결과다.

40% 이하로 떨어진 국정 지지율은 단지 윤석열 정부 탓으로만 치부하기엔 2개월이란 기간이 너무 짧다. 광우병과 촛불, 노무현 대통령 탄핵 의결과 자살, 박근혜 대통령 탄핵 등 정치적 격변이 이어지면서 민심은 매우 거칠어졌고, 진영은 강화됐다. 이에 따라 정권을 향한 반대 진영의 공세와 지지 진영의 방어는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 국정과 아무 관련 없는 신변잡기를 물고 늘어지기 일쑤고, 사실관계에 부합하지 않는 온갖 왜곡과 억측이 SNS에 난무한다. 국정을 제대로 수행하기가 힘들 정도다.

마지막 위기 징후는 정치의 예능화다. 총선뿐만 아니라 대선마저 인기투표화 하는 양상이다. 정치 경험 없는 검찰총장 출신이 사표 낸 지 7개월 만에 대통령에 당선됐다. 상대 후보였던 여당 후보도 의회 경험이 전무한 데다 두 번의 자치단체장을 거치면서 온갖 의혹에 휩싸였다. 지난 대선은 여야 모두 당내 여건상 어쩔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치지만, 사실 이런 현상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갓 검사 옷을 벗은 법무부 장관이 차기 대선 후보 1, 2위를 다투는 건 일반적이지 않다.

국회의원 공천도 마찬가지다. 마치 오디션 또는 홈쇼핑 하듯 이채로운 경력의 후보들을 국민 앞에 선보이며 감성에 호소한다. 감각적인 후보에 집중하다 보니, 검증을 제대로 하지 못해 각종 구설수로 중간 낙마가 부지기수다. 이렇게 당선된 정치인들은 민생과 국익을 위한 정책을 생산하기보다 언론 주목도 경쟁을 하게 된다. 또한 진영과 팬덤에 영합하다 보니 공수처나 검수완박법 같은 파행적 결과를 만들어 낸다.

정치규범의 해체로 정쟁은 격화하고, 극단적 진영화로 국민은 분열되고, 정치의 예능화로 실력은 저하돼 가뜩이나 어려운 국내·외적 위기 상황에 제대로 대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장기 팬데믹 사태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민생 경제는 심각한 지경이다. 역대 정권이 내팽개쳐 온, 이젠 더는 미룰 수 없는 연금, 노동, 교육개혁은 강한 명분, 여야 합의, 국민 동의가 필수다. 그런데 40% 이하로 떨어진 국정 지지율과 격화된 정치 상황, 분열된 민심으론 해결이 난망하다. 지금의 정치 위기는 정치공학적으로 풀 수 있는 수준을 넘었다. 정치권의 통찰적 지혜가 요구되는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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