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서구 구랑·미음동, 고려~조선 전기 한·일 교류 거점”

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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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객관·견조암수참 있던 곳

일본 사신 접대 장소 이용

300년 넘게 교류의 거점 역할

탑동 유적·와룡리 건물터 유력


고려시대 상감청자 조각 등이 출토된 부산 강서구 미음동 탑동유적의 집석 유구. 고려시대 금주객관 터였을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이 나왔다. 부산일보DB 고려시대 상감청자 조각 등이 출토된 부산 강서구 미음동 탑동유적의 집석 유구. 고려시대 금주객관 터였을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이 나왔다. 부산일보DB

부산 강서구 구랑동과 미음동 일대는 한·일 교류의 역사적 장소라는 점에서 주목해야 한다. 이곳에 고려시대에 금주객관, 조선 전기에 견조암수참(見助巖水站)이 있었다는 주장이 계속 나오고 있다. 각각 200년, 100년 이상 일본 사신을 접대하던 곳이다. 두 곳은 조선시대의 초량왜관 전신 같은 것으로 부산에 한·일 교류의 접점이 시대에 따라 아주 풍부하게 양상을 달리하면서 계속 존재했다는 것을 알려주는 매우 중요한 자료다.

■새로운 주장 “미음동에 있었다”

최근 성현주 부산박물관 학예연구관은 ‘부산 출토 명문 분청사기의 현황과 성격’(〈박물관연구논집〉 27집)이란 글을 통해 금주객관과 견조암수참이 강서구 미음동에 있었다는 새로운 주장을 내놨다. 지난 2010년 부산·진해 경제자유구역 개발 사업지구에 속하는 이 일대 반경 1.25㎞ 안에 유적 4곳이 발굴됐는데 그중 와룡리 건물터가 일본 사신을 접대한 견조암수참의 중심 건물 자리였을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이다. 이 건물터는 2013년 발굴 보고서에서 정확한 것을 알 수 없어 사찰이나 서원으로 막연하게 추정됐을 뿐이다.

와룡리 건물터를 견조암수참으로 보는 근거는 여럿이다. 이곳에서 출토된 ‘밀양장흥고(密陽長興庫)’ 명 분청사기 조각은 조선시대 명품으로, 이 정도의 명품은 일본 사신의 접대와 관련이 높다고 봐야 한다는 거다. 특히 현재 육지인 이 지역은 18~19세기까지 퇴적되기 전의 바다로 배를 정박할 수 있는 대규모 수참에 가장 적합한 위치였다는 거다. 그래서 4곳 유적은 모두 당시 해안 지역에 위치하는, 견조암수참 관련 건물이며 그중 면적 100㎡ 이상에 정면 5칸, 측면 3~4칸의 가장 큰 건물이 있던 와룡리 건물터가 견조암수참의 중심 건물이었다는 거다. 또 와룡리 건물터와 거의 인접해 지난 2007년 확인된 ‘조선 전기 이전에 조성된 도로 유적’도 이 일대에 중요 시설이 있었다는 것을 뒷받침한다는 거다.

특히 성 학예관의 주장에서 주목할 것은 유적 4곳 중 ‘탑동 유적’이다. 이곳에서 13세기의 수준 높은 상감청자 조각 등 고려시대 유물이 나왔다. 이를 근거로 성현주 학예연구관은 “이곳이 일본 사신을 접대한 고려시대 금주객관 자리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한다. 베일 속 금주객관에 접근하는 주장의 하나다.

■기존 주장 “구랑동에 있었다”

금주객관과 견조암수참 위치와 관련한 기존 주장은 강서구 구랑동에 있었다는 거다. 구랑동은 미음동과 접하여 경제자유구역 개발지구의 남쪽에 있다. 이미 이종봉 부산대 교수는 지난 2004년 ‘고려시대 대일교류와 부산’이란 논문을 통해 구랑동에 주목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 교수는 ‘명월산(明月山) 아래 구량촌(仇良村)에 견조암수참(見助巖水站)이 있는데 왜사(倭使)를 접대한다’라는 1530년의 〈신증동국여지승람〉 기록을 주목한다. 이 기록의 ‘구량촌’이 ‘구랑동(九郞洞)’이라는 거다. 지사천을 사이에 두고 자연마을인 구랑마을(구랑동)과 수정마을(미음동)이 마주 보고 있는데 이 ‘수정’마을이 ‘수참’에서 유래한 이름이라는 거다. 더욱이 이곳에 옛 ‘수참’에서 유래한 ‘수참교’란 다리까지 있다는 거다. 실제 1920년대 초까지 지사천 중간 지점인 이곳에 조그마한 ‘구랑촌 수참’ 마을이 있었다. 지금은 개발로 없어졌다.

■대일 교류 역사적 거점 ‘낙동강 하류’

금주객관과 견조암수참의 위치와 관련해서는 현재 두 가지 견해가 있는 셈이다. 기존 견해는 이곳 남쪽의 지사천과 구랑동 쪽이고, 새로운 주장은 북쪽의 범방천 상류 미음동 쪽이다. 남쪽이든 북쪽이든, 낙동강 둔치도를 마주한 현재의 구랑동과 미음동이 고려시대~조선 전기, 300년 훨씬 넘게 대일교류의 거점이었다는 데에는 이론이 없다.

새길 점이 있다. 첫째 과연 낙동강 하류는 대일 교류의 자연적 역사적 거점이라는 거다. 구랑동 미음동 일대는 범방패총을 비롯해 신석시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각종 유적 20여 곳이 밀집한 곳이다. 이 뿐만 아니라 고대 가야 시대에는 김해 봉황대까지 아예 배가 들어갈 정도로 낙동강 하구는 천혜의 교역 거점이었다. 오늘날 가덕도를 중심으로 거대하게 구축 중인 부산신항도 넓게 볼 때 교역 거점인 낙동강 하구의 역사적 연장선상에서 볼 수 있다. 둘째 고려시대 금주객관의 비밀에 접근하는 자료가 쌓이는 것은 지역사 복원에서 아주 중요한 대목이다. 부산 지역사에서 고려시대 자체는 ‘잃어버린 고리’처럼 기초 자료가 너무 없는 실정이다. 2010년 ‘미음동 고려시대 가마터’가 발굴돼 대단한 주목을 받은 것은 그 때문이기도 하다. 셋째 산업단지와 부산신항의 배후 물류도시로 개발된 구랑동 미음동은 대단한 역사성을 갖춘 곳이니 만큼 당연히 역사성도 함께 새겨나가야 한다는 거다.



▶금주객관과 견조암수참=금주객관은 1049년(문종 3년) 이전에 설치돼 1268년(원종 9년)까지 200년 넘게 존속한 고려시대 대일교류 전담 창구다. 견조암수참은 조선 전기 사량진왜변(1544) 이전까지 낙동강 수로를 이용해 서울을 오르내리던 왜인들을 감독하던 첫 관문이자, 접대·숙박처로서 왜관적 성격을 띤 곳이다.


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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