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로365] 인신매매 2등급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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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정희 ㈔여성인권지원센터 ‘살림’ 상임대표

미 국무부 인신매매 보고서 한국 강등

인신매매 범죄 기소 건수 감소 이유

거대한 성 착취 산업 등 환경도 문제

인신매매 방지법 처벌 규정 미비

인권 문제 지속적 정책 의지도 회의적

국제사회 냉정한 평가 경각심 가져야


몇 해 전 일이다. 감금된 채 성 착취 피해를 입은 태국 여성이 목숨을 걸고 탈출하였고, 인근 편의점 직원에게 쪽지로 도움을 요청하여 겨우 구출되었다. 감금된 곳은 다름 아닌 서면 롯데백화점 8차선 도로 맞은편 건물의 폐업한 철학관. 부산의 번화가 중심지에서 믿지 못할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이 사건의 관련자들은 감금으로 기소되었으나 인신매매로는 처벌되지 않았으며, 피해 여성을 비롯한 다른 태국 여성들은 출국 조치되었다. 최근 한국이 미 국무부가 발표한 인신매매 보고서에서 인신매매 2등급 국가로 강등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가장 먼저 부산에서 벌어진 이 사건이 떠올랐다.


미 국무부는 2000년 UN 인신매매 방지를 위한 의정서가 채택된 이후 2001년부터 매년 각국의 인신매매 현황과 정부 차원의 노력을 평가하여 등급을 부여해 왔다. 한국은 첫 해 최하위인 3등급을 받았다. 보고서는 한국이 아시아에서 인권, 민주주의의 선도국이지만, 인신매매 문제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았다고 보았다. 한국은 인신매매의 발생국이자 경유국으로 젊은 여성들이 성적 착취의 대상으로서 외국으로 매매되거나 외국 여성들이 한국을 경유하여 세계 다른 지역으로 매매되고 있다고 했다. 이후 성매매 방지법이 제정되어 인신매매 방지 및 피해자 보호를 주요하게 다루고, 피해자 보호 체계를 만드는 등의 노력으로 한국은 20년간 인신매매 1등급 국가의 지위를 유지해 왔다. 가까운 나라 일본은 2등급, 북한은 줄곧 3등급이다.

비록 1등급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간 인신매매 보고서는 한국이 성 착취와 노동에서 발생하는 인신매매 범죄에 대한 기소, 유죄 판결이 낮은 점, 외국인 피해자 보호 조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점, 한국인이 아시아 국가에서 아동 성 착취의 주요 구매자라는 점 등을 꾸준히 지적해 왔다. 이번 보고서에서도 강등 이유로 인신매매 범죄 기소 건수 감소와 외국인 성매매 피해자를 추방하는 등의 불이익, 성매매 업주에 대한 처벌 미약, 관계 당국의 피해자 확인 지침 미활용, 외국인 선원 대상 노동착취 방기, 인신매매 범죄자에 대한 낮은 형량을 꼽았다.

그렇지 않아도 한국은 인신매매 범죄에 취약한 환경이다. 보고서에서 언급한 대로 가출 청소년, 가정폭력 피해자 등 한국 여성과 아동을 주점, 나이트클럽, 기타 유흥업소에서 성매매로 착취하고 있으며, 피해자를 모집하고 성매매를 강요하기 위해 스마트폰과 채팅 앱이 활성화되어 있다. 유흥업소를 비롯한 상업적인 성 착취 산업의 규모 역시 거대하다. 불법 거래 시장을 분석하는 미국 하복스코프(Havocscope)에서 2015년 한국의 전체 성매매 산업 규모를 약 120억 달러(약 14조 4000억 원)로 추산하여 24개국 중 6위를 기록했다. 같은 해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은 조직범죄 단체의 불법적 지하경제 운영 실태를 조사하면서 한국의 성매매 시장 규모를 하복스코프 추산치의 3배 수준인 30조~37조 6000억 원으로 추정하였다. 이러한 환경은 인신매매 범죄를 더욱 적극적으로 끌어당긴다.

그러나 위 태국 여성의 피해 사례에서도 본 것처럼 이러한 범죄가 인신매매로 다루어지지도 않고, 피해자들은 한국에서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 성 착취 인신매매만의 문제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염전 노예’ 사건은 장애인이 피해를 입었지만 그 누구도 인신매매 범죄로 처벌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2021년 인신매매 방지 및 피해자 보호법이 제정되어 곧 시행을 앞두고 있다. 그러나 피해자를 지원해 온 현장 단체와 전문가들은 이 법은 결정적으로 처벌 조항이 없어 한계가 명백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인신매매 범죄자에 대한 제대로 된 처벌 규정이 없는 반쪽짜리 법도 문제지만, 정부와 지자체에서 인권의 문제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과 정책 의지가 있는지도 회의적이다. 당장 부산만 하더라도 인권 정책은 오히려 후퇴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비판을 받고 있다. 부산시는 지난해 인권센터를 설립하고 인권 정책 기본계획을 수립한 바 있지만, 민선 8기 행정조직 개편에서는 인권과 노동의 문제를 다루는 민생노동정책관을 폐지하고 각 과로 업무를 분산시켰다. 정부 역시 충분한 대안 없이 성 착취 피해자를 전담하여 지원하는 정부 부처라 할 수 있는 여성가족부 폐지에 열을 올리고 있다. 인신매매 보고서에서 한국의 인신매매 근절을 위한 노력은 진지하지도, 지속적이지도 않았다고 꼬집은 대목이 더욱 뼈아픈 이유다.

인신매매는 인간의 존엄과 인권에 있어 가장 기본적인 지표이며 인신매매 근절을 위한 노력은 국제 사회의 가장 중요한 규범이다. 부끄럽지만 2022년에 2등급으로 강등된 국가는 한국이 유일하다. 국제사회의 냉정한 평가에 더욱 경각심을 가져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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