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이런 정치가 재난 속 시민을 구할 수 있을까

전창훈 기자 jch@busan.com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전창훈 서울정치팀장

이웃 위해 희생 선택한 영화 속 사람들
분열 심화된 우리 사회에서 ‘판타지’ 같아
혐오와 분열 일삼는 정치 리더십 탓 커
임박한 위기, 리더십·시민의식 일신해야

치사율 100%의 바이러스 테러가 일어난 인천발 하와이행 항공기. 도착 즈음 미국은 회항을 요구하고, 돌아가는 중 나리타 공항에 비상착륙하려던 시도는 일본 정부의 거부로 무산된다. 어렵게 구한 치료제의 효과가 의심되자 자국 국민마저 착륙을 두고 격렬하게 찬반 시위를 벌이는 절체절명의 위기. 승객들은 과연 어떤 선택을 할까? 영화 ‘비상선언’ 속 상황이다.


감염 사실에도 포기할 수 없는 생존 본능과 바이러스 숙주가 될 수 없다는 이성 사이에서 갈등하던 승객들은 결국 가족과 시민의 안위를 위해 “내려가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그 희생적인 선택에 뭉클해지면서도 요즘 우리 현실과는 맞지 않는 ‘판타지’라는 생각이 더 짙게 들었다. 어찌 보면 공동체를 위한 상식적인 결정이지만, 갈수록 분열하는 우리 공동체 안에 과연 그만큼의 이타심과 연대 의식이 남아있는지 자신할 수 없어서다.

이런 회의감은 최근 하루가 멀게 목도해야 하는 우리 정치권의 지리멸렬함 탓이 크다. 그게 어제 오늘 일은 아니지만 혐오와 배제가 일상화된 요즘 여의도를 보고 있자면, 정치가 위기 상황에서 국민을 공동선으로 이끄는 최소한의 리더십이라도 발휘할 수 있을까 의구심이 커진다. 무인도에 표류한 건 같지만 ‘15소년 표류기’의 소년들은 우여곡절 끝에 합심해 위기를 극복했고, ‘파리대왕’의 소년들은 편을 나눠 싸우다 공멸의 길을 갔다. 지금 정치는 누구 봐도 후자에 가깝다.

며칠 전 집권당 대표에서 강제 하차한 국민의힘 이준석 대표가 “저를 ‘이 XX, 저 XX’ 하는 사람을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열심히 뛰었다”며 윤석열 대통령과 소속 당을 향한 전면전을 예고했다. 배신감에 눈물까지 흘렸지만, 사실 언행으로 치자면 이준석 대표가 그렇게 섭섭해 할 일인가 싶기도 하다. 그 역시 인생 대선배인 안철수 의원을 향해 그 못지 않은 험구를 퍼부었고, 대선 당시 윤 후보에 대한 비난 발언은 리스트가 있을 정도다. 그의 퇴출 배후에 ‘윤핵관’(윤 대통령 핵심 관계자)의 사감과 권력욕이 있었다지만, 자기 실력에 취해 적 만들기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 이 대표의 부덕함이 자초한 면도 크다.

그렇다고 윤 대통령과 윤핵관의 책임이 가벼워지는 건 아니다. 윤핵관의 가장 큰 잘못은 이준석을 배제했지만 이준석보다 나은 실력을 증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철규 의원은 지난 9일 국정 지지율 하락 원인으로 △이준석의 비협조 △전 정부 적폐청산 미이행 △여론조사기관의 편향성을 꼽았다. 이 대표의 ‘내부 총질’에 ‘전 정부 파헤치기’마저 미진하면서 핵심 지지층이 이탈했고, 좌파 성향 여론조사기관의 가세로 지지율이 비정상적으로 하락했다는 게 윤핵관식 정세 판단인 셈이다. 그 말을 들으니 ‘이준석 찍어내기’에 혈안이 된 것도, 걸핏하면 문재인 정부와 비교하는 윤 대통령의 화법도, 귀향한 전직 대통령이 그악스러운 시위대에 몇 달째 시달리는 기현상의 배경도 이해된다.

그런데 정말 이 의원이 지목한 문제들이 해소되면 지지율이 올라갈까? 전 정부의 적폐청산은 국정농단에 대한 분노로 대다수 국민의 지지를 받았지만 그마저 5년 내내 이어지면서 극도의 피로감을 낳았다. 0.73%포인트 차이로 승리한 현 정부의 전임 정부 때리기가 지지층의 복수 심리를 충족하는 것 외에 어떤 확장 효과를 거둘 수 있을지 의문이다. 오히려 과도할 경우 역풍이 불 가능성이 높다.

집권 100일도 안돼 권력암투에 골몰하는 여권의 오만함에 탄식이 나온다면 ‘이재명당’으로 일사불란하게 나아가는 더불어민주당의 상황에는 왠지 좀 섬뜩함이 느껴진다. 자신이 선두에 선 대선과 지방선거에서 연패하고, 온갖 사법 리스크는 현실화 되는데도 이재명 후보에 대한 여권 내 지지는 더 압도적이다. 문재인 전 대통령의 최측근도 ‘이심(李心)’을 거스르는 발언 하나로 ‘숨은 수박’이라며 몰매를 맞았다. ‘싸움꾼’ 이재명으로 당을 접수하고, ‘절대악’ 윤 정부를 무력화하겠다는 적대감 아니면 달리 설명하기 힘든 현상이다.

최근 중부지방 폭우는 기후변화가 가까운 미래도 아닌 바로 지금의 문제임을 절감케 했다. 전문가들은 10년 내에 우리 사회에 식량 위기가 도래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팬데믹 속에 제국주의 전쟁이 재연됐고, 신냉전 시대가 부상하고 있지만 우리는 내부의 적을 절멸하는 데 모든 에너지를 쏟고 있다.

그 소모적인 증오의 전장에서 진짜 중요한 무언가가 파괴되고, 유실되고 있다. 우리 정치는 과연 다가올 복합 위기에 대비할 역량을 모을 수 있을까? 우리 시민 사회는 영화 속 승객들처럼 공공의 이익을 위해 헌신할 수 있을까? 불안감이 순간 순간 엄습하는 요즘이다.


전창훈 기자 jch@busan.com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