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부산 지배세력 중 동평 이씨 있었다”

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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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봉 교수 “이들이 덕천동 유적 피장자”
낙동강 하류서 상업 활동 경제적 부 축적
만덕동 ‘기비사’ 절터서 나온 고려 청자
덕천동 16호 무덤 출토 고급 청자와 같아
동평 이씨가 ‘기비사’에 청자 시주 주장

고려시대 분묘 18기 등을 확인한 부산 덕천동 유적 발굴 모습. 고려시대 최고급 청자를 생산한 전남 강진의 청자가 출토된 무덤의 주인공은 부산 황령산 서쪽을 아우르는 지역인 동평현의 재지세력으로 추정된다. 부산박물관 제공 고려시대 분묘 18기 등을 확인한 부산 덕천동 유적 발굴 모습. 고려시대 최고급 청자를 생산한 전남 강진의 청자가 출토된 무덤의 주인공은 부산 황령산 서쪽을 아우르는 지역인 동평현의 재지세력으로 추정된다. 부산박물관 제공

부산시가 발간한 〈항도부산〉 제43호에 게재된 이종봉 부산대 사학과 교수의 논문 ‘중세 부산의 역사와 만덕동 사지’는 그간 전혀 드러나지 않은 고려시대 동평현 재지세력에 접근한 논문이다. 특히 동평현과 덕천동 유적, ‘기비사’의 연결고리를 밝히면서 고려시대 부산의 한 모습을 그려낸다.

우선 동평현은 부산에서 대체로 황령산의 서쪽, 그러니까 오늘날 부산진구 동구 서구 중구 영도구 사하구 사상구 북구를 아우른 지역이다. 이 교수는 “조선 초기 14~15세기 기록(〈세종실록〉 〈동국여지승람〉)에서 고려시대 동평현의 토성(土姓) 지배세력으로 동평 이씨와 동평 안씨를 처음 찾아냈다”고 했다. 이중 동평 이씨 기록이 더욱 분명한데, 고려 말 여진족에서 귀화한 무관 이지란(퉁두란)의 아들 이화상의 처가 동평 이씨라는 기록이 있다는 것이다. 이들 성씨는 고려시대 동래 정씨 경우처럼 동평현의 재지 지배세력으로 볼 수 있다는 거다.



덕천동 유적 16호 무덤에서 출토된 ‘상감기법의 국화문 마상배’ 고려청자. 부산역사문화대전 캡처 덕천동 유적 16호 무덤에서 출토된 ‘상감기법의 국화문 마상배’ 고려청자. 부산역사문화대전 캡처

이 교수는 “동평현은 낙동강을 끼고 있었다”며 “동평 이씨 등 동평현의 재지 지배세력은 낙동강을 기반으로 다양한 경제활동을 전개했을 것”이라고 했다. 이 교수는 이들 동평현 지배세력과 관련한 새로운 자료를 하나 더 찾아냈다. 고려 문종 20년, 1066년에 동평현의 선악사(仙岳寺) 종을 만들 때 이를 주도한 향리층으로 ‘호장(戶長) 득의(得意)와 주백(周伯)’의 이름이 나오는 일본 자료다. 득의와 주백은 동평 이씨, 동평 안씨일 가능성이 높은데, 이 자료를 통해서는 동평현이 호장을 중심으로 한 향리 직제를 갖추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자료의 ‘선악사’는 부산 부산진구 선암사와 발음이 비슷하지만 다른 사찰이다. 선암사는 고려 때 견강사로 불렸다는 것이다.

이 교수가 동평현의 지배세력과 관련해 주목하는 것은 지난 2005년 발굴 조사한 부산 북구 ‘덕천동 유적’이다. 다양한 무덤 중 특히 고려시대 무덤(목관묘) 18기에서 출토된 고급 청자들과 북송 등의 중국 동전들을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16호 무덤에서는 고려시대 최고급 청자를 생산한 전라도 강진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이는 ‘상감기법의 국화문 마상배’ 청자가 출토됐다. 이 교수는 “16호 무덤은 고려시대 동평현 재지 지배세력의 무덤”이라며 “이 세력은 해상과 강, 즉 낙동강 하류를 통해 상업활동을 활발히 전개해 중국 돈을 소유할 정도로 경제적 부를 축적했을 것”이라고 했다. 고려시대 동평현 지배세력뿐 아니라 낙동강 인근에서는 역시 고급 청자가 출토된 김해 덕산리 절터와 부산 용당동 유적의 재지세력도 해상을 통해 상업활동을 펼쳤을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결국 동평현과 덕천동 유적은 기비사와 연결된다는 것이 이 교수의 주장이다. 만덕동 절터의 절 이름은 기존에 만덕사로 알려졌으나 이 교수는 ‘기비사’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본다. ‘기비사’ 명문이 나왔기 때문이며 여러 방증 자료에 의해 ‘기비사’가 더 유력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교수가 주목하는 것은 3차례에 걸친 이 절터의 발굴 조사에서 출토된 고려시대의 고급 청자들이다. ‘규석 받침을 사용한 고급 청자’ ‘팔각접시 청자’ ‘완형의 해무리굽 청자완’ ‘흑백상감 대접’ 등이 그것이다. 덕천동 유적에서 출토된 것과 같은 고급 청자다.

이 교수는 “전라도 강진 요지에서 가져온 이들 고급 청자는 동평 이씨 등 동평현의 재지 지배세력이 유통시켜 이 절에 시주했을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기비사’, 덕천동 유적은 모두 동평현 영역에 속하면서 연결 고리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동평현의 지배세력인 동평 이씨 등이 덕천동 유적의 피장자이며, 이들이 선악사 종을 만들 때 주동한 향리층이었으며, 나아가 ‘기비사’의 핵심적 시주였을 거라는 주장이다.

조금 더 살펴볼 것이 있다. 이 교수는 “동평 이씨와 동평 안씨는 동래 정씨와 같은 유명 인물을 배출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한다. 우선 이들에 대한 더 이상의 확실한 기록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이 교수에 따르면 고려 초기에 부산은 홀대를 받았는데 그 이유는 부산의 재지 호족들이 후삼국 쟁투 때 후백제 견훤을 지지하면서 줄을 잘못 섰기 때문이다. 부산 인근의 호족으로 양주(양산)의 김인훈과, 울주(울산)의 박윤웅이 왕건 편에 적극 가담해 그 이름까지 남겼던 것과 대조적이다. 부산(동래군 기장현 동평현)은 대가를 치렀다. 동래군과 기장현은 울주의 속현(屬縣)으로 전락했고, 동래군에 속하던 동평현은 양주의 속현이 돼버렸다. 동래가 주현(主縣)인 동래현으로 위상을 회복하기 시작한 것은 11~12세기 동래 정씨가 3대(정목 정항 정서)에 걸쳐 계속 고위 관직에 오르면서였다.

그러나 동평현은 고려시대 내내 양주(양산)의 속현으로 남아 있었다. 그것은 동래 정씨와 같은 고위 관직에 오른 유명 인물을 배출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조선 전기 동래현 성씨조를 보면 내성(來姓)으로 동래 이씨가 있는데, 당시 동평현이 ‘동래의 동평면’으로 바뀌면서 동평 이씨가 본관을 동래 이씨로 바꾸었을 가능성을 점쳐볼 수 있다는 것이 이 교수의 주장이다.

이 교수는 “동평 이씨는 낙동강을 기반으로 상업활동을 전개하면서 부를 축적하였을 것”이라며 “동평 안씨에 대한 자료는 더 이상 확인할 수 없어 아쉽다”고 했다.



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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