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영의 시인의 서재] 패터슨 시내를 산책하는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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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시와사상’ 편집위원

지역성 녹아든 짐 자무쉬 영화 보다가
서민 일상 담아낸 윌리엄스의 시 떠올라
가난하고 고통스러운 유색인 삶 투영
생의 좌절·실패 넘는 새로운 시선 주목

부산은 국제영화제 때문에 영화의 도시로 알려져 있다. 부산시도 엄청난 예산을 투입하고 시민들도 촬영 장소 제공에 협조하거나 많은 편의를 제공한다. 부산에 연고를 두고 오랫동안 예술 활동을 한 작가나 예술가에 대한 영화를 제작하는 것은 어떨까? 부산의 지역성(locality)을 최대한 살리는 방편으로 부산에 사는 인물과 거리와 식당과 말투가 스며든 예술영화가 출현하기를 기대한다. 이런 생각을 떠올린 것은 짐 자무쉬(Jim Jarmusch) 감독의 영화 ‘패터슨’(Paterson·2016)을 보고 잔잔한 감동을 받았기 때문이다.


미국 시인인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William Carlos Williams·1883~1963)는 후기에 〈패터슨〉이라는 5권의 연작 시집을 발표한다. 초기에 그는 이미지즘의 영향을 받아 일상어로 된 짧고 간결한 이미지의 시를 발표했다. 후기에는 그가 살았던 뉴욕 근처의 소도시인 패터슨에서의 삶을 기록하듯이 묘사해 가장 미국적인 시인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평범한 미국 서민들의 삶을 쉬운 일상어로 묘사했다. 그가 활동하던 시기는 현학적인 모더니즘 시가 주류를 이루었고, 그는 상대적으로 덜 평가받았다. 사후에 출간한 〈브뤼겔의 그림들〉 시집으로 그는 퓰리처상을 받고 그의 이름을 딴 문학상이 제정되었다.

미국 문학사에서 그는 월트 휘트먼의 계보를 잇는 시인으로 평가받지만 나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영화 ‘패터슨’을 보고 난 뒤에 그의 시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시를 좋아하는 것도 개인의 취향이 많이 반영된다. 솔직히 나는 윌리엄스가 시적 기법이 아주 탁월하거나 비범한 시인으로 와 닿지 않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시인으로 느껴졌다. 패터슨에서 소아과와 산부인과 의사로서 주민들을 치료한 삶이 그의 시에 스며 있다. 특별할 것 없는 소소한 일상의 사물과 서민들이 그의 시적 소재로 자주 등장한다.

영화 ‘패터슨’의 주인공인 패터슨은 버스 기사인데 일상에서 느낀 것을 노트에 적으면서 담담하게 시적인 삶을 살아간다. 그는 유명한 시인도 아니고 책을 출간한 적도 없지만 순수하게 시를 쓰는 데서 기쁨과 성취를 느끼는 소시민이다. 기성 시인과 아마추어 시인의 경계를 허무는 착상이 빛난다. 누구나 시를 쓸 수 있으며 시인으로서의 명성이나 대중의 반응에서 자유로운 삶이 더 가치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패터슨은 윌리엄스의 시를 좋아하고, 이 영화를 만든 짐 자무쉬 역시 그의 시적 세계를 탁월한 영상으로 풀어낸다.

윌리엄스는 시 ‘옹호(Apology)’에서 다음과 같이 시인으로서의 사명감을 밝힌다. ‘나는 오늘 왜 시를 쓰는가?//이름 없는 사람들의/처량한 얼굴에 서린/아름다움이/내가 시를 쓰도록 자극한다.//나이 들고 산전수전 다 겪은- /유색인종의 여성들/날품팔이 일꾼들-/석양에 집으로 돌아온다.’ 그의 어머니는 푸에르토리코 출신이었고 아버지는 영국 출신인데 미국으로 건너온 이민 1세대였으며, 미국에서 정착하면서 고난을 겪었다. 특히 그가 활동한 1930년대 전후는 대공황의 시기여서 유색인의 가난하고 고통스러운 삶이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윌리엄스는 그들의 일상을 선명하고 경쾌한 이미지로 묘사해 독자와 비평가들의 관심을 끈다.

언어적 실험이 많이 들어간 〈패터슨〉 2권에 수록된 ‘일요일 공원에서(Sunday in the Park)’에는 윌리엄스의 시적 사유가 응축된 구절이 있다. ‘어떤 패배도 패배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패배가 여는 세상은 언제나/이전에 예상하지 못한 하나의 장소이기 때문이다./하나의 잃어버린 세계/하나의 예기치 않은 세계는 새로운 장소를 부른다. 그리고 (잃어버린)흰 세계는/기억 속의 그 흰색만큼 희지는 않다.’

누구나 겪게 되는 삶에서의 좌절과 실패에 대해 그는 새로운 비전을 제시한다. 실패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 이면에 새로운 희망이 숨어 있으니 용기를 잃지 말라고 격려한다. 영화에서 패터슨이 애써 쓴 시 노트를 애완견 마빈이 물어뜯어 놓아 실의에 빠졌을 때 산책길에서 만난 일본 시인이 건넸던 대사 “때로는 텅 빈 페이지가 가장 많은 것을 선사한다”와도 연결된다.

폭우가 내리고 무더웠던 8월이 끝나면 새로운 계절이 다가올 것이다. 실패한 나 자신의 쓰라린 가슴을 토닥토닥 위로해 주자. 이 세상에서 내 마음을 알아줄 사람은 아무도 없는지도 모른다. 괴로운 심연을 다 꺼내어 보여 줄 수 없는 막막함을 견뎌야 한다. 그러나 실패를 딛고 우리는 새로운 장소를 열어 나가는 개척자가 될 수 있다. 도전하는 삶은 그 자체로 찬란한 비상이니, 가벼운 마음으로 힘껏 날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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