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온고지신

김마선 기자 msk@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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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마선 정치부장

지지율 하락, 여권 내 갈등 심화
윤석열 대통령 백일 만에 사면초가

권력 초기 ‘병목 위기’ 극복 위해
윤핵관 관리, 민생 살피기 힘써야

위기 상황 인정, 자기 책임 수용 등
국정 정점에서 책임지는 자세 필요

창업(創業)보다 어려운 것이 수성(守成)이다. 춘추전국시대를 끝낸 진(秦)은 불과 15년(기원전 221년~206년) 만에 무너진다. 중국 최초의 통일 제국이라는 명성에 비해 허망한 결말이다. 가혹한 형벌, 분서갱유로 대표되는 언로 차단, 권력 내부의 혈투가 겹친 결과다.

그 뒤를 이은 것이 한(漢)이다. 이 왕조는 약 400년간 대륙을 통치하며 중국 문명의 원형이 되었다. 한자(漢字), 한족(漢族)도 한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백수건달 유방이 명문 집안의 초패왕 항우를 제치고 등극할 수 있었던 것은 세 사람 덕분이다. 바로 장량, 소하, 한신이다. ‘서한삼걸’에 대한 유방의 평가는 어떨까.


“군대 막사 안에서 계책을 짜내 천리 밖 승부를 결정짓는 일에서 나는 장자방(장량)보다 못하다.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을 어루만지며 수송로가 끊어지지 않게 양식을 보급하는 일에서 나는 소하만 못하다. 백만 대군을 동원해 싸웠다 하면 승리하고 공격하면 반드시 점령하는 일에서 나는 한신만 못하다.” 자신을 낮추면서도 용인(用人)에 뛰어남을 자랑한 셈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위기다. 국정지지율은 20~30%대를 헤맨다. 한때의 지지자들마저 등을 돌렸다는 이야기다. 잇단 실언, 정책 혼선, 일방적 정책, 무능력, 인사 난맥상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탓이다. 희망이 실망으로 바뀌는 데 채 100일이 걸리지 않았다. 이런데도 여당은 권력투쟁에 혈안이다. 비상대책위가 꾸려졌고, 쫓겨난 이준석 전 대표는 윤 대통령과 윤핵관(윤 대통령 핵심 관계자)을 공격한다.

개국 초기에는 ‘병목 위기’를 잘 넘겨야 한다. 공(功)의 경중을 따지는 ‘논공행상’과 이합집산에 따른 ‘숙청’이 있기 마련이다. 윤핵관의 득세와 이준석의 퇴출은 병목 상황의 현대적 모습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전과 다른 점은 올해가 유난히 요란하고, 험악하다는 것이다. 윤 대통령의 당내 기반이 약하고 정치 경험이 적어 통상적 권력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는 영향이 있다. 여권 내 불통은 문제를 키운다.

혹자들은 이준석을 향한 여권의 총공세를 ‘토사구팽(兎死狗烹)’으로 규정한다. 교활한 토끼가 죽으니, 사냥개를 삶는다는 말이다. 이 같은 신세의 원조는 한신이다. 항우가 죽은 뒤 역모를 꾀했다는 혐의를 받고 숙청된다. 헌정 사상 최연소 당대표였던 이준석에게도 선거 승리 뒤 위기가 찾아온다. 표면적으로 성접대 의혹 때문이지만 공소시효가 지난 탓인지 변죽만 울린다. 그 사이 당은 윤핵관 중심으로 재편됐고, 이에 질세라 이준석은 가마솥을 뒤엎고 적을 물어뜯던 이빨로 아군을 물어뜯는다.

한이 병목 위기를 딛고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은 민생을 잘 살핀 덕분이다. 또 장량 같은 이는 권력을 내려놓고 조용히 초야에 묻힌다. 그의 행보는 ‘지지(知止)’라는 말로 압축된다. 그만두는 것을 안다는 뜻. 그런데 지난달 11일 친윤(친윤석열)계 박수영 의원이 자기 페이스북에 ‘지지(知止)’라는 글을 올렸다. ‘당원권 정지 6개월’의 징계가 내려진 이준석을 겨냥한 것이다. 또 윤핵관 장제원 의원은 ‘여의도의 장자방’으로 불린다고 한다. 정치인들은 역사를 반만 공부하는 걸까. ‘지지’를 되새겨야 할 이는 다름 아닌 윤핵관들이다. 2선 후퇴론이나 험지 출마론을 정략적으로만 볼 게 아니다.

이달 초 폭우 때 정부 대응은 부실했다. 또 정책은 거칠고 혼란스럽다. 지금의 권력다툼은 국민을 위한 것인가. ‘민생’이 안중에 있기는 한가. 공정과 상식은 흐려지고, 그 자리에 오만과 무능의 이미지가 채워지고 있다. 국민들에게 심판받은 민주당 모습이 어른거린다.

재러드 다이아몬드 교수가 쓴 〈대변동-위기, 선택, 변화〉라는 책이 있다. 명저 〈총, 균, 쇠〉 〈제3의 침팬지〉의 작가다. ‘위기 치료’를 표방하며 여러 나라의 위기극복 노하우를 모았는데, 대통령에게 요긴할 것 같아 요점만 정리한다.

먼저 위기라는 사실 자체를 인정해야 한다. 윤 대통령은 지난달 초 지지율 40%대가 무너졌을 때 “연연하지 않고, 오로지 국민만 보고 가겠다”고 말했다. 인사 난맥상, 김건희 여사 리스크, 여권 내 갈등이 불거졌지만 나 몰라라식이었다. 그러다 지난 8일 휴가 복귀 때 “초심을 지키겠다”고 밝혔다. 초심의 내용을 떠나, 최소한 위기 자체를 인정하는 것 같아 다행이다.

또 자기 책임을 수용하는 게 중요하다. 당정 문제 중 윤 대통령에게서 비롯된 게 적지 않다. 권성동 원내대표에게 ‘내부 총질’ 문자를 보낸 것도 대통령이다. 설사 변화 대상이 타인(이를테면 이준석)이라 해도 그 변화를 유도할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전 정부를 탓하거나 저 놈보다 낫다는 식의 상대적 우위를 주장해서도 안 된다. 대통령은 국정의 정점에서 책임지는 자리 아닌가. 처음이라 잘 모른다면 온고지신(溫故知新)도 한 방법이다. 옛 사례는 차고 넘친다.


김마선 기자 msk@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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