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박스 서면 머리가 하얘져” 프로 골퍼도 못 피한 ‘압박감’… 스포츠 정신의학

김병군 선임기자 gun39@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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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황장애·우울증·거식증 등 악순환
LPGA 전인지 선수도 한때 시달려
슬럼프·입스·초킹 명확히 구분해야
약물 치료·멘탈 트레이닝으로 극복

‘LPGA 메이저 퀸’으로 불리는 전인지도 한때 성적 부진으로 우울증과 거식증에 시달렸을 만큼 스포츠 선수에게 정신과적 영역의 증상은 흔하게 나타난다. 지난달 LPGA 투어 에비앙 챔피언십에 참가한 전인지. 연합뉴스 ‘LPGA 메이저 퀸’으로 불리는 전인지도 한때 성적 부진으로 우울증과 거식증에 시달렸을 만큼 스포츠 선수에게 정신과적 영역의 증상은 흔하게 나타난다. 지난달 LPGA 투어 에비앙 챔피언십에 참가한 전인지. 연합뉴스

KLPGA 대회에서 우승 경력이 있는 프로 골프선수 A 씨는 공황장애에 시달린 적이 있다. 어느 날 국내 대회에 참가했다가 갑자기 1번 홀 티박스에서 드라이버샷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머리가 하얘지는 상황이 발생했다. 죽을 것 같은 공포가 몰려오고, 숨 쉬기가 힘들고, 손발까지 떨려 결국 라운드를 포기했다. 이후 다른 대회에서도 동일한 증상이 나타나 기권을 하는 경우가 잦아졌다. 심리 상담과 코칭을 전전했지만 별다른 호전이 없었다. 그러던 중 스포츠 정신의학을 전공하는 의사로부터 항불안제를 처방 받고 멘탈코칭을 받으면서 증상이 호전되기 시작했다.


■‘정신력 약해서’, ‘고생 안 해봐서’ 엉뚱한 질책

대개 운동선수들이 제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면 지도자들은 ‘정신력이 약해서’, ‘고생을 안 해봐서’라며 질책한다. 그래서 우울증, 불안증 등의 증상이 나타나도 선수 개인의 노력 부족으로 몰아세우는 일이 많다.

정신과 영역의 증상이 나타나면 질책이 아닌 치료가 필요하다. 운동선수에게도 우울증, 불안증, 강박증, 거식증, 불면증, 성격 장애 등의 문제가 나타날 수 있고 때로는 일반인보다 훨씬 가혹한 증상과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장유누가병원 신동진 정신건강의학과 과장은 “운동 수행능력이 떨어질 때 정신과 영역의 문제가 선수에게서 발견될 경우 원인치료를 먼저 해주어야 한다. 그러지 않고 선수 개인의 노력 부족이나 마음가짐을 탓하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스포츠 활동에서 나타날 수 있는 정신과 영역의 여러 증상을 단순히 멘탈 코칭이나 심리상담 수준에서 해결하려는 경향이 아직도 많다. 심리상담은 정신의학 관점에서 선택할 수 있는 많은 수단 중에 하나다. 어떤 경우에는 최선의 치료 방법이 아닐 수도 있다.

정신과 질환은 대개 도파민, 세로토닌, 노르에피네프린 등 뇌 속의 신경전달물질에 교란이 발생해서 생기는 경우가 많은데 단순 상담으로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다리가 부러진 사람에게 수술이나 치료 없이 재활 운동부터 시작하라는 것과 마찬가지다.

신동진 과장은 “증상의 경중에 따라서 적절한 투약이 필요하며 공황장애나 불안 같은 몇몇 증상들은 약물에 의해서 빠르게 호전되기도 한다. 하지만 일부 약물은 몸을 처지게 하거나 졸리게 하는 등 운동에 방해되는 부작용이 나타날 수도 있기 때문에 약 선택 시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스포츠 선수는 약물에 의한 도핑에 아주 예민하다. 그래서 약물을 처방할 때는 각 종목이나 대회마다 금기하는 약물이 다르기 때문에 규정에 맞춰 복용해야 하며 이때 반감기나 지속시간도 고려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대부분 한국도핑방지위원회에서 제시하는 규정을 따르고 있으며 몇몇 국제 수준의 대회에서는 세계도핑방지기구의 규정을 따르고 있다.

■슬럼프, 입스, 초킹

LPGA 무대에서 뛰고 있는 전인지는 수년전에 거식증과 우울증으로 심하게 마음고생을 한 적이 있었다. 성적부진에 시달리면서 우울증과 거식증의 악순환이 이어졌다고 한다.

스포츠 선수들은 체중조절과 컨디션 유지가 중요하기 때문에 거식증 같은 섭식장애 유병률이 일반인보다 높다. 일반인은 거식증 유병률이 0.4%지만 스포츠 선수는 13.5%, 특히 여자 운동선수는 20%나 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우리가 흔히 아는 우울증도 스포츠 선수인 경우는 양상이 조금 다르다. 유병률은 일반인과 차이가 거의 없지만 증상이 조금 달라 열정의 감소, 연습을 빠지는 행위, 과도한 자기비판, 슬럼프 등의 형태로 나타난다.

긴장 상황에서 일어날 수 있는 슬럼프, 입스, 초킹, 우울증에 대해서도 정확히 감별해서 대처해야 한다.

입스는 내가 전혀 긴장하지 않아도 될 순간에 과도한 긴장으로 인해 실수를 반복적으로 하는 것이다. 극도로 긴장되는 대회가 아닌 보통의 연습 상황에서도 아주 쉬운 드라이브샷을 계속 놓친다.

슬럼프는 지속적인 경기력의 저하를 뜻한다. 입스가 원인이 될 수도 있겠지만 동기의 저하, 의욕 상실 등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을 수 있다. 초킹은 극심한 긴장감으로 질식할 듯이 숨이 막히고 생각과 행동이 얼어붙는 현상을 말한다.

신동진 과장은 “입스가 와서 슬럼프가 오고 슬럼프가 와서 우울증이 올 수도 있고 그 반대가 될 수도 있다. 이런 정신적 문제가 꼭 선수에게만 일어나라는 법은 없으며 일반인에게도 언제든지 올 수 있다”고 지적했다.

■진화하는 멘탈 트레이닝 기법

스포츠 활동에서 일어나는 정신과적인 문제를 다루는 의학을 ‘스포츠 정신의학’이라고 부른다. 좁게는 멘탈 트레이닝이나 정신과 질환의 치료부터 넓게는 스포츠 활동 중에 일어나는 모든 정신과 문제에 대해 다루는 학문이라고 볼 수 있다.

스포츠 정신의학은 스포츠 심리학을 포괄하는 개념이며 신경생물학적 접근까지 시도되고 있다. 멘탈 트레이닝 기술도 최근 들어선 첨단과학의 힘을 빌려 급속도로 발전 중이다.

멘탈 트레이닝은 기본적으로 운동을 배우는 것과 비슷하다. 멘탈 조절능력을 타고난 사람도 있는 반면 노력으로 보완하는 사람도 있다. 따라서 멘탈 트레이닝도 개인에 맞춰서 시행되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선 뇌의 생리학적인 부분과 심리학적인 부분 모두를 고려하는 정신의학적 접근이 필수적이다.

뇌훈련 프로그램에 IT와 빅데이터를 활용하는 것도 보편화되고 있다. 독일 프로축구팀 호펜하임에서는 ‘헬릭스’라는 뇌훈련 시스템이 오래전부터 도입됐다. 180도 스크린에 빠르게 움직이는 선수들 중에서 같은 팀 선수가 많은 쪽을 선택하게 하는 훈련 장비다. 또 미국, 아일랜드, 스웨덴 등의 스포츠 팀에서는 ‘시선 추적기’를 사용하여 운동 중에 시선이 어떻게 변하는지에 대한 연구와 피드백이 이루어지고 있다.

브레인 도핑이라는 훈련방식도 스포츠 학계에서 화제다. 전두엽에 전기 자극을 주어 운동능력을 향상시키는 것이다. 근래에는 브레인 도핑이 뇌졸중, 파킨슨 등 뇌질환 치료를 위한 임상에도 활용되고 있다.


김병군 선임기자 gun39@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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