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말 광] <973>내 말 주인은 바로 나

이진원 기자 jinwoni@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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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원 교열부장

‘그 다음에 유동성을 보면 90달러 이하로 쉽게 내려오기는 어렵다고 보여지는 거죠. 따라서 관련주들에 대한 움직임도 유심히 보셔야 한다고 보여집니다.’

어느 경제 전문가가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한데, ‘보여지는, 보여집니다’가 껄끄럽다. ‘보이는, 보입니다’로도 충분한데, 보조동사 ‘-어지다’를 덧붙여 피동을 재차 강조했기 때문이다. 겹피동은 자신감이 없어 보이고 쓸데없이 공간만 더 잡아먹을 뿐이니 될 수 있으면 피하는 게 좋다. ‘오늘은 강정호의 컨디션이 ‘좋은 것으로 보여집니다’’는, 컨디션이 ‘좋아 보입니다’면 충분한 것.

어느 신문에 실린 바둑 기사 가운데 ‘저우루이양이 택한 흑29는 두어 지고 보니 훌륭한 착점이다’에서는, ‘두고 보니’로 써도 아무 문제가 없는데 굳이 ‘두어 지고 보니’로 써서 껄끄럽다.

‘제도권 교육에서는 우리 음악이나 춤을 가르치기보다는 서양 것을 가르침으로써 이미 우리들의 모든 의식과 감각은 그것에 길들여지게 되어 버렸다.’

이 문장에서는 거창한 겹피동이 보인다. ‘길들다’의 사동 ‘길들이다’를 다시 ‘길들여지다’라는 피동으로 만들었는데, 그것도 모자라 ‘길들여지게 되다’로 썼다. 하지만 문제는 ‘길들다’에 이미 피동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 그러니 ‘길들었다, 길들어 버렸다’면 충분한 것을 ‘길들여지게 되어 버렸다’로 질질 늘어뜨린 셈이다. 단정적으로 표현하기가 거북해서 저렇게 썼을 수도 있겠지만 권장할 만한 문장은 아니다.

한편, 피동 표현엔 또 다른 문제가 있다. 아래는 영화 ‘내부자들’에서 조국일보 주필 이강희가 검찰 조사를 받고 나와 기자들 앞에서 한 말.

“대선을 앞둔 상황에서 이런 사건이 벌어진 것은 조폭 안상구가 알 수 없는 조직의 사주를 받은 정치 공작과 연관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 끝에 단어 세 개만 좀 바꿉시다. ‘볼 수 있다’가 아니라 ‘매우 보여진다’라고.”

여기서 이강희가 굳이 피동 표현으로 바꾼 것은, 주관적인 자기 말을 객관적인 것처럼 보이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 그러니, 저렇게 속이려는 의도가 아니라면 말과 글을 쓸 때 주체가 돼야 한다. 자기 말글의 주인도 못 된다면 대체 어디서 주인 노릇을 하겠는가.

“우크라이나는 국제법 위반 행위에 의해서 침략을 당한 국가로 정의가 되고 있습니다. 그것이 국제사회에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판단입니다.”

지난주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한 말인데, ‘국제사회에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이 ‘국제사회가 보편적으로 받아들이는’이었다면 더 좋았겠다 싶다.


이진원 기자 jinwoni@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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