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사직 찐팬'을 기억할 공간이 필요하다

정광용 기자 kyjeong@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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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광용 스포츠부장

미국 LA 다저스, ‘빈 스컬리 기자실’ 명명
스페인 발렌시아CF, ‘영원한 지정석’ 지정
해외 구단, 찐팬 길이 기억하기 위한 배려
롯데 구단도 ‘사직 할아버지’ 공간 마련을

지난주 롯데 자이언츠는 진정한 팬을 잃었다. ‘사직 할아버지’로 알려진 캐리 마허 전 영산대 교수가 지난 16일 별세했다. 향년 68세. 2년 전 다발성 골수종 진단을 받고 치료 중 코로나19가 겹쳐 합병증으로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한국전쟁 참전용사의 아들인 그는 2008년 한국에 첫발을 내디뎠다. 영산대 학생들과 사직야구장에 처음 들렀다가 운명처럼 롯데 팬이 됐다. 2013년부터 롯데의 전 경기를 직관하며 응원했다.

덩치 크고 수염이 덥수룩한 ‘푸른 눈의 사나이’는 어느덧 사직구장의 터줏대감이 됐고, 부산 팬은 물론 전국 팬들에게서 롯데 자이언츠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그의 사연은 국내 언론을 넘어 미국 CNN, ESPN 같은 매체에도 소개될 정도였다.

생전에 그는 “롯데는 첫사랑이자 가족이다. 성적이 나쁘다고 바꿀 수는 없다”며 롯데 야구에 ‘무한 애정’을 드러냈다.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그에게 부산과 롯데 야구는 삶 그 자체였다. 마지막 가는 길에도 그는 자신의 전 재산과 부의금을 부산 야구 발전을 위해 써 달라는 유언을 남긴 ‘찐팬’이었다.

부산 야구팬과 롯데 선수단은 그의 마지막 길을 함께했다. 그와 추억을 함께한 롯데 팬 8명이 공동 상주로 나섰고, 이대호를 비롯한 롯데 선수들도 애도하며 명복을 빌었다. 17일엔 사직구장에서 경기 전 롯데 구단이 추모행사를 열었으며, 팬들은 늘 그가 경기를 지켜보던 ‘1루 지정석 121블럭 4열 8번 좌석’에 헌화 공간을 마련하기도 했다.

그 후 일주일, 무언가 아쉬움이 남는다. 마허 전 교수 같은 진정한 팬을 그냥 떠나보내기엔 마음 한 구석이 허전하다. 흔히 ‘팬이 있어야 스포츠가 있다’는 말처럼 팬은 모든 스포츠의 존재 이유기도 한데, 이런 찐팬을 기억할 공간이라도 하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마허 전 교수가 떠나기 13일 전, 태평양 건너 미국에서도 또 한 명의 찐팬이 세상을 떠났다. 메이저리그 LA 다저스의 경기를 67년간 전담 중계한 ‘다저스의 목소리’ 빈 스컬리가 94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1950년부터 2016년까지 다저스의 흥망성쇠를 함께한 그는 방송인이면서도 다저스의 진정한 팬이었다. 다저스는 그의 업적과 헌신을 기리기 위해 홈 구장인 다저스타디움 기자실을 ‘빈 스컬리 프레스박스’로, 다저스타디움 앞길을 ‘빈 스컬리 애비뉴’로 명명했다.

스페인 프로축구 프리메라리가 발렌시아CF 홈 구장 메스타야 스타디움엔 한 팬의 ‘영원한 지정석’이 있다. 비센테 나바로란 팬의 좌석인데, 그는 2016년 세상을 떠났다. 평생 시즌권 회원이었던 그는 1982년 시력을 잃은 뒤에도 아들과 함께 경기장에 나와 발렌시아를 응원했다고 한다. 이에 구단은 창단 100주년이던 2019년 그가 늘 앉았던 지정석에 동상을 만들어 앉히고 항상 경기를 지켜볼 수 있도록 했다. 스타 선수들의 영구결번처럼 ‘영구결석(永久缺席)’으로 지정해 그의 팬심을 영원히 기념한 것이다.

2017년 3월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 명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맨유)의 홈 구장인 올드 트래퍼드 한 켠에 한 팬의 유골이 뿌려졌다. 윌리엄 무어란 이 팬은 아내와 함께 평생 맨유를 응원한 골수팬이었다. 뇌종양으로 사망한 그와 2015년 먼저 숨진 아내의 유골이 유족의 요청에 따라 이날 올드 트래퍼드 경기장에 영원히 묻혔다. 맨유 구단은 고인의 생일이나 기일에도 유족들이 경기장에서 추모 시간을 갖도록 배려했다고 한다.

“너희들이 볼펜 한 자루라도 만들어 본 적이 있느냐? 너희 같이 생산성 없는 공놀이를 하면서 이렇게 돈 벌고 대접받는 것은 팬들이 있기 때문이다. 팬들한테 잘해야 한다.”

과거 연세대 농구부를 이끌던 최희암 전 감독이 한 말이다. 아마도 프로 스포츠와 팬의 관계를 가장 적확하게 나타낸 표현이 아닌가 싶다. 팬이 없는 스포츠는 그들만의 공놀이에 지나지 않는다. 프로 스포츠가 일찍 뿌리내린 해외 구단들은 공놀이를 스포츠로 만드는 팬의 가치를 잘 알기에 이런 배려를 하지 않았을까.

롯데는 40년 역사의 한국프로야구 원년 멤버다. 국내 프로팀 중 가장 긴 역사를 가진 구단이기도 하다. 구도 부산을 연고로 해 어느 구단보다 팬들의 사랑을 듬뿍 받아 왔다. 부산 팬들은 롯데의 성적보다 휠씬 깊은 애정을 보여 왔다. 이제 그 사랑을 구단이 팬들에게 돌려줄 때가 온 것 같다.

구단 차원에서 누구보다 뜨겁고 융숭했던 ‘찐팬’의 열정을 추모하고 기억할 작은 공간이라도 마련하면 어떨까. 영구결석까진 아니더라도 사직구장 한 켠에 그의 이름과 동판이라도 새겨 넣는다면…. 이는 KBO가 표방한 ‘팬 퍼스트’를 실현하는 좋은 본보기로도 남을 것이다.


정광용 기자 kyjeong@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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