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빌런은 누구인가?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서정아 소설가

아이가 아주 작았을 때, 어디를 가든 아이를 안거나 업거나 혹은 유아차에 태운 채로 움직여야 했다. 마치 아기 코알라를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엄마 코알라처럼 늘 2인 1조였다고나 할까. 그때도 자가용이 없었기 때문에 이동시에는 대중교통을 이용했다. 어린아이와 함께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이 사실 쉬운 일은 아니다. 일단은 아이를 유아차에 태운 채 버스에 승차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지하철을 타는 경우에도 가끔은 엘리베이터를 못 찾아서 유아차를 들고 낑낑거리며 계단을 오르내려야 했다. 겨우 승강장까지 가더라도 승객이 많으면 타기가 어려웠고, 승강장과 열차 사이 간격이 넓은 곳에서 타고 내릴 때는 유아차 바퀴가 그 사이에 끼어 버릴까봐 전전긍긍했다. 여러 번 불편을 겪은 후로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는 그냥 아기띠를 사용해 안고 다녔다. 아이는 점점 무거워졌고 어깨와 허리에 무리가 갔지만 어쩔 수 없었다. 가장 난감한 경우는 대중교통 안에서 아이가 칭얼거리는 때였다. 대체로 잠이 오거나 배가 고프거나 뭔가 불편한 상황이었는데 버스나 지하철에서 아이가 울기 시작하면 나는 식은땀이 났다. 곱지 않은 시선으로 우리를 자꾸 쳐다보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이 뭐라고 한 마디 할까 싶어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했는데도 서둘러 내리곤 했다.

하지만 도중에 내릴 수 없는 경우라면 어떻게 해야 했을까? 고속버스, 기차, 혹은 비행기 안에서 아이가 운다면? 무협지의 주인공이라도 된 것처럼 아이를 안고 사뿐히 뛰어내리는 기술을 연마해야 할까? 아니면 승무원에게 낙하산을 하나 달라고 해서 비상 탈출이라도 해야 하나? 물론 우는 아이의 불편함을 재빨리 알아차려 그것을 해결해주고 달래는 일이 우선이다. 그러나 어떻게 해 보아도 그 울음이 도무지 달래지지 않는 때가 있다. 뭔가가 불편한데 말을 하지 못하니 아이는 그저 울어대고, 보호자의 마음은 타들어간다. 그런 상황에서 누군가가 폭력적인 말과 행동으로 불만을 토로해 사회적으로 논쟁거리가 되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 얼마 전에도 국내선 비행기 안에서 아이가 운다는 이유로 한 남성이 아이 가족에게 폭언을 하고 난동을 부렸던 사건이 있었다. 그는 아이의 부모에게 이렇게 소리쳤다고 한다. “애XX가 교육 안 되면 다니지 마. 자신이 없으면 애를 낳지 마. 이 XX야.” 간혹 부모의 태도에도 문제가 있는 경우가 있으니 전후 사정을 살펴보아야 하겠지만, 적어도 그 말에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교육? 말을 하지 못하는 어린 아이들이 그들의 언어인 울음으로 불편을 호소하고 있는데, 과연 어떤 교육을 해야 하는 걸까? 정작 교육이 필요한 사람들은 따로 있지 않나?

사실 어느 집단에나 자기중심적이며 예의를 지키지 않고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들은 있다. 아이들이 특별히 더 남에게 피해를 주는가?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공공장소에서 타인으로 인해 불쾌했던 일을 떠올려보면 어린이보다는 어른으로 인한 경우가 훨씬 많았다. 지하철에서 큰 소리로 전도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다리를 쩍 벌린 채 자리 두 개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도 있고, 공원에서 자기 강아지가 싼 똥을 치우지 않고 가버리는 견주가 있으며, 음식점 종업원이나 아파트 경비원에게 말도 안 되는 갑질을 해대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도서관 열람실 안에서 큰 소리로 전화를 받는 어른들을 나는 매일 본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런 어른들에게 ‘교육을 못 받았으면 밖에 나다니지 마!’라고 소리치지 않는다. 욕설을 퍼붓거나 침을 뱉지 않는다. 그저 속으로 혀를 차거나 ‘거, 조용히 좀 합시다.’하고 점잖게 한 마디 할 뿐이다. 반항할 수 없는 존재인 아이에게, 그리고 그 아이를 안고 있는 보호자에게, 사람들의 시선과 언어는 때때로 너무 가혹하다. 빌런은 과연 누구인가?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