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희와 함께 읽는 우리 시대 문화풍경] 역사의 단애(斷崖)에 선 단심(丹心), 백산 안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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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대 대학원 예술·문화와 영상매체협동과정 강사

백산 안희제 선생. 부산일보DB 백산 안희제 선생. 부산일보DB

가랑비 흩뿌리는 이른 아침, 하룻밤 유숙한 의령 운곡마을에서 임란의병의 혼이 깃든 벽화산성터에 올랐다. 감밭을 지나 능선에 이르도록 비는 쉽게 잦아들지 않았다. 가야고분들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고, 산정에 이르는 길에는 산죽만이 한 시대 비탄의 역사를 뒤덮고 있었다. 세월의 풍화와 세인의 무관심에 무너지는 것이 어디 이뿐이랴. 점심 무렵 설뫼마을 백산 안희제 선생의 구저(舊邸)에 다다랐을 때는 봇도랑이 넘치도록 소낙비가 내렸다. 고택은 단아하면서도 청고한 기품을 지녔다. 사랑채 툇마루에 앉으니 너른 마당이 한눈에 들어온다. 소박한 장독대와 우물은 여느 살림집의 정경이다. 저 우물에서 군자금을 끝간 데 없이 길어 올렸을까. 만주 목단강성 경무청으로 압송되던 그날, 마지막으로 고단한 삶을 씻었을까. 낙숫물 소리를 들으며 백산의 삶을 깊게 응시한다.

“민족사상의 고취자요 민족교육의 선각자요 민족자본의 육성자시며 민족언론의 선구자이자 민족의 지도자이신 백산 선생이 여기 잠들어 계신다.” 1976년 산수 이종률과 김의환이 공찬한 백산의 묘비명이다. 창남학교, 의신학교, 구남학교, 대동청년당, 백산상회, 기미육영회, 매체 〈자력(自力)〉, 중외일보사, 발해농장에 이르기까지 그의 삶을 오롯이 담았다. 교육과 경제, 사회, 언론·문화, 종교 영역에 두루 걸친 백산의 삶은 한결같이 광복항쟁과 맞닿아 있다. 담대한 실천의 폭과 깊이를 어찌 쉽게 가늠할 수 있으랴.

백산의 삶이 온전하게 갈무리되지 않은 까닭은 활동이 광대무변했으며 철두철미하게 흔적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스로 폐기한 〈만몽일기〉를 비롯해 그의 삶을 증언해줄 사료가 많지 않다. 이를 섬세하게 복원하는 일이란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의 삶은 사람사랑 나라사랑의 실천이었으며, 자력으로 독립해 자유로운 국가를 건설하는 데 있었다. 그의 뜻과 정신을 제대로 현창하지 못하는 것은 손쉬운 망각보다 더 아쉽고 두려운 일이다. 광복의 한길로 창대하게 나아갔던 백산은 임오교변으로 순국했다. 9개월의 모진 고문과 악형 끝에 출감한 지 불과 하룻밤을 넘기지 못했다. 절명에 이르는 그 시각, 장남과 자상한 대화를 나누었다 전한다. 원사(寃死)였으나 반장(返葬)하여 향리 고산재 뒤편 언덕에 유택을 마련했다.

산뽕나무 갈참나무 그늘이 깊어가는 우기, 묘소에 이르는 길은 내내 가파른 오르막인데도 가슴은 실로 벅찼다. 후인들이 백산의 뜻을 받들고자 마련한 빗돌에는 푸른 이끼가 자욱하지만, 그 길에서 만난 백산의 정신은 선연했다. 망연한 나날 속에서 백산의 웅혼한 광복지의(光復之意)를 되새기고 돌아서니, 매미소리가 산자락을 온통 에워싸며 발걸음을 더디게 한다. 석류가 붉게 익어가는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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