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대 한국 사회의 ‘공허’와 ‘허무’에 관해 묻다

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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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수사/장강명

미제 살인사건 소재로 한 ‘철학소설’
뒷부분엔 ‘엽편소설’ 등장 구조 ‘눈길’
한국사회 일상이 된 ‘불안’ 들춰내고
살인자 독백 통해 ‘공허’에 대해 성찰

소설가 장강명은 장편 <재수사>를 통해 “한국사회의 가장 깊은 문제는 공허와 불안”이라고 말한다. 은행나무 제공 소설가 장강명은 장편 <재수사>를 통해 “한국사회의 가장 깊은 문제는 공허와 불안”이라고 말한다. 은행나무 제공

장강명의 장편소설 〈재수사〉는 2020년대 한국사회의 가장 깊은 문제를 ‘공허’와 ‘불안’으로 꼽는다. 1980년대 이후 1990년대의 고비를 넘기면서 한국사회가 달라졌다는 것이다. 시대를 통찰해보겠다는 ‘야심’을 지닌 작품이다. 미제 살인사건을 소재로 한 일종의 철학소설로 읽혔으면 한다는 것이 작가의 주문이기도 한다.

무엇보다 〈재수사〉는 도스토옙스키가 어른거리는 작품이다. 도스토옙스키는 장강명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라고 한다. 이 소설은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 〈악령〉 〈백치〉를 염두에 두고 썼다고 한다. 〈백치〉는 소설에서 주요하게 차용되고 있다.


소설은 2개의 축을 지닌다. 형식적으로는 100개 장으로 이뤄져 있는데 50개의 홀수 장은 미제 살인사건 범인의 독백과 사유가 밀도 있게 전개되고, 다른 50개의 짝수 장은 이 미제사건을 재수사하는 형사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홀수 장과 짝수 장이 교차하는 호흡이, 다소 무리수를 포함하더라도 크게 보면 읽히게 한다는 점이 이 소설의 강점이다.

형사들의 재수사 얘기를 따라가면 몇 단계를 거치게 된다. 1권의 마지막쯤에서 A가 의심스러워지다가, 2권으로 넘어가서 B가 결정적 단서를 제공하고, 그 단서에 따라 C를 지목하면서 DNA 확증을 쥐고 드디어 범인으로 검거한다. 그러나 잡아놓은 범인 C는 뭔가 이상하다. 전혀 뜻밖의 진범 D가 사건 발생 22년 만에 드러나는 것이다.

이 형사들의 재수사 얘기 속에 작가가 말하는 ‘한국사회의 불안’이 녹아 있다. 작가에 따르면 한국사회에 불안이 가시화된 것은 1990년대 말이고, 가장 상징적인 사건은 1997년 외환위기다. 그 이후에 개인들은 흩어졌고, 불안은 한국사회의 일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1990년 이후에 대학을 다닌 사람들은 다들 자기가 학생운동의 마지막 목격자”라고 한다는 것이다. 사회적 열정과 거대 담론이 사라진 자리에 자리잡은 것은 나르시시즘이다.

“우리가 젊었을 시절부터 사회가 병이 든 거지. 나르시시즘의 시대가 시작된 거야, 그때부터. 한국에서도, 미국에서도. 이제 모든 사람의 관심사는 나, 나, 나야. SNS에 포스팅 하나 올리는 짧은 시간에 약삭빠르게 계산들을 하죠. 내가 얼마나 멋져 보일지, 내가 얼마나 공감 능력이 많은 사람처럼 비칠지, 내 사진이 얼마나 잘 찍혔는지, 그래서 그 모든 게 나한테 얼마나 이익이 될지…. 보다 심오한 걸 찾는 사람들의 시야도 ‘나’를 벗어나지 않아. 만날 찾아다니는 게 고작 ‘진정한 나’잖아.” 편해지고 먹고살 만해진 시대의 본질은 불안이라는 것이다. 그 불안의 배후에는 공허가 있다는 것이다.

공허 문제는 좀 복잡하고 깊다. 살인자의 독백과 기록에서 공허에 대한 성찰과 철학이 나온다. 현대 공허의 뿌리는 계몽사상에 있다. 인간 정신 속에 빛이 들어왔으나 계몽주의로 인해 잃은 것은 신이다. 계몽주의가 낳은 현대의 거대 사상인 (미국식)민주주의, 자본주의, 마르크스주의, 진화론은 신을 지우고 인간의 자유를 확장했다. 인간 개인에게 돌아오는 그 막막한 몫, 그러한 함의를 도스토옙스키는 두려워했다는 것이다. “유권자들의 선택, 소비와 생산, 진화에는 끝이 없다. 그러므로 내세도 낙원도 없다. 현세가 무한히, 요동을 치며 이어진다. 종말이 없기에 세계 전체를 아우르는 하나의 이야기도 없다.” 인간 삶을 하나의 방향으로 이끄는 거대 서사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게 공허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그걸 일찍이 간파한 이가 도스토옙스키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계몽주의 버전 2.0’인 신계몽주의가 필요하다는 애기도 나온다.

소설 맨 뒤 부분에 엽편소설이 하나 나온다. 원주율 계산을 끊임없이 하는 한 수학자가 있었다. 처음에는 별 의미 없이 했는데, 자꾸 하다 보니 그 속에 굉장한 의미를 스스로 발견한다. 원주율의 무한 속에 신과 악마의 메시지도, 수학자 자신의 인생 의미도 들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뜻밖에 그 의미가 다른 젊은 수학자를 만나면서 한순간에 무너진다. 삶, 우주, 신의 비밀을 알았다고 했으나 그것이 무너져버린 것이다. 그러나 무너졌다고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인류 도정이 의미를 세우고, 또 무너지고 하는 과정을 거쳐왔다는 것이다. 무너질지언정 의미를 세워야 한다는 것으로 읽힌다.

마지막에 이런 부분이 나온다. 미제사건을 추적한 형사는 22년 전에 살해당한 피해자의 숨결이 느껴지는 듯하다. 사건이 해결됐으니 이제 그 숨결은, 의미가 사라지는 것처럼 사라진다. 형사는 천천히 맥주를 마시며 어둠을, 허무를, 빈 공간을 오래도록 노려보았다고 한다. 의미가 있던 자리는 계속 그 자리로 있는 것이 아니라 무너지고 사라지고 한다는 것이다. 그게 우리가 견뎌야 하는 허무라는 것이겠다. 다른 의미를 다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아닐까. 장강명 지음/은행나무/1권 408쪽, 2권 412쪽/각권 1만 6000원.



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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