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님, 아버님과 인생 사진 어떠세요?[산복빨래방] EP 13.

김준용 기자 jundragon@busan.com , 이상배 기자 sangbae@busan.com , 김보경 harufor@busan.com , 이재화 jhle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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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복빨래방] EP 13. 산복사진관

30여 장의 사진을 모두 펼쳐놓고보니 사진 속 어머님, 아버님들은 모두 웃고 있었습니다. 30여 장의 사진을 모두 펼쳐놓고보니 사진 속 어머님, 아버님들은 모두 웃고 있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산복빨래방입니다. 빨래방에서 매주 역사 속 인물들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산업화 시대 여공, 한 평생 가족을 위해 일만했던 아버지, 자신보다 자식 뒷바라지에 바빴던 이제는 할머니가 된 엄마들이 오늘도 빨래방 문을 열고 들어옵니다.

빨래방에서 처음 본 주민들은 고령화 된 산복도로에 사는 할머니, 할아버지였습니다. 하지만 시나브로 사연을 알아가면서 할머니, 할아버지는 '역사 속 주인공'으로 우리 눈에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빨래방을 환하게 웃으며 찾아오는 주인공들과 함께 하고 싶은 일이 점점 늘어가고 있습니다.


■아가씨 졸업사진


어머님의 흑백사진에서 ‘산복사진관’은 시작됐습니다. 장순엽 어머님 제공 어머님의 흑백사진에서 ‘산복사진관’은 시작됐습니다. 장순엽 어머님 제공

“어머님 지난주에는 바쁘셨습니까? 왜 이렇게 오랜만에 오셨어요?”

동네 친구들과 함께 나들이를 다녀왔다는 장순엽 어머님. 어디 다녀오셨냐고 묻자 대뜸 스마트폰을 건넵니다. 스마트폰에는 사진이 가득했습니다. 나란히 앉아 함께 앨범을 구경합니다. 얼굴을 손으로 받친 ‘꽃받침’ 포즈를 한 사진. 예쁜 꽃, 나무, 산 등 다양한 사진이 등장합니다. 손녀 사진이 나오자 손녀 자랑도 빼놓지 않으십니다.

수많은 사진 중 한 사진이 눈에 띄었습니다. 흑백 사진 속 젊은 여성이 환히 웃고 있습니다.

“어머니 이게 누굽니까?”

“허허허, 누구긴 누구야, 아가씨 졸업 사진이여”

흑백 사진 속 어머님은 한 손을 점퍼 주머니에 넣은 채 포즈를 취하고 있습니다. 결혼 하기 전 제대로 찍은 마지막 독사진이라 어머님은 사진을 ‘아가씨 졸업사진’이라고 불렀습니다. 젊은 시절의 자신을 기억하고 싶어서 독사진을 찍었다고 합니다.

“어머님, 요새는 사진관 가서 사진 안 찍어보셨죠?”

“이제 찍으면 영정 사진을 찍어야지, 뭐 이쁘다고 사진을 찍어”


동생과 찍은 사진을 꼬깃꼬깃 들고 다니는 어머님. 산복빨래방에서 빳빳한 새로운 사진으로 복원해드리기로 약속했습니다. 동생과 찍은 사진을 꼬깃꼬깃 들고 다니는 어머님. 산복빨래방에서 빳빳한 새로운 사진으로 복원해드리기로 약속했습니다.

불현듯 며칠 전 일이 떠올랐습니다. 빨래방 단골인 김순이 어머님은 우리에게 사진 한 장을 건넸습니다. 때 묻은 흑백사진입니다.

“내 동생하고 찍은 사진이야, 20살 어린 동생과 찍은 사진인데 동생을 내가 업어 키웠거든”

사진 뒷면에는 반창고 흔적이 가득합니다. 사진이 찢어질 때마다 반창고를 덧대 붙이신 것 같습니다.

“어머님 사진이 자주 다쳤나 보네요?”라며 농담을 건네봅니다.

“계속 들고 다녔지, 혹시 이거 좀 이쁘게 다시 뽑아줄 수 있어?”


■빨래방 대신 사진관

어머님의 ‘아가씨 졸업 사진’, 반창고가 덕지덕지 붙은 남매 사진을 보면서 사진의 의미를 되새겨봅니다. 어머님, 아버님이 사진관에서 최근에 언제 사진을 찍어보셨을까 하는 생각도 스쳐갑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길 가다 가도 우정 사진, 기념 사진을 필름 사진 부스에서 손쉽게 찍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버님, 어머님들에게는 사진을 찍는 일은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어머님들에게는 어느새 익숙한 공간이 된 빨래방에서 사진 한 장을 남겨드리고 싶었습니다. 어머님, 아버님의 지갑과 마음 속에 꼬깃꼬깃 갈무리한 젊은 시절의 ‘인생샷’도 좋지만 충분히 아름답고 멋진 ‘2022 인생샷’을 남겨드리고 싶었습니다.


사진 장비를 빨래방으로 옮기는 건 하나부터 열까지 번거롭고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어머님들의 환한 미소에 '잘했구나'싶었습니다. 사진 장비를 빨래방으로 옮기는 건 하나부터 열까지 번거롭고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어머님들의 환한 미소에 '잘했구나'싶었습니다.

산복빨래방이 산복사진관으로 변신했습니다. 산복빨래방이 찍는 사진은 그동안 어머님, 아버님이 찍었던 사진과는 달랐으면 했습니다. 젊은이들이 찍듯이 자유분방하고 웃음 가득한 사진이면 더욱 좋을 것 같았습니다.

지금은 빨래방에서 매일 일하지만 본사인 <부산일보>에 있는 장비들이 떠올랐습니다. 회사에서 인터뷰를 진행할 때 찍는 사진용 장비들은 사진관 버금가는 장비들입니다. 회사에는 최고의 실력을 자랑하는 사진부 후배도 있습니다. 장비와 인력 모든 게 완벽했습니다.

문제는 '어떻게 장비를 옮기지'였습니다. 마음이 앞서자 일은 생각보다 쉬웠습니다. 차의 조수석을 눕혀 겨우 장비를 실어 빨래방에 사진관을 설치했습니다. 비를 쫄딱 맞았지만 어머님, 아버님의 웃는 모습을 상상하니 힘들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주황색 사진 배경 종이도 샀습니다. 조명과 배경지를 설치하니 그럴듯한 모습을 갖춘 멋진 사진관이 됐습니다.



조명을 달고 배경지를 설치하니 그럴듯 한 사진관으로 빨래방이 변신했습니다. 조명을 달고 배경지를 설치하니 그럴듯 한 사진관으로 빨래방이 변신했습니다.

8월의 어느 날, 오전 10시부터 어머님들이 평소와 다른 모습으로 찾아오셨습니다. 예전에는 보기 힘들었던 목걸이부터 미용실이라도 다녀오신 듯한 정갈한 헤어 스타일까지 어머님들은 한껏 꾸미고 빨래방을 찾았습니다. “다 늙었는데 뭐 하러 사진을 찍나”던 어머님들도 사실 예쁜 사진 한 장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진부 김종진 기자의 지휘 아래 사진 촬영이 시작됐습니다. 오랜만에 찍는 ‘각잡힌’ 사진에 어색한 웃음이 묻어났습니다. “어머님 웃으세요”, “웃어야 이쁩니다”하는 이야기에도 표정은 쉽게 풀리지 않았습니다. 서로의 허리를 잡고 기차 포즈를 취하자 까르르 웃음이 터집니다. 한 어머님이 “멸치 대가리~”하자 어머님들은 박장대소합니다. 웃음 포인트가 멸치대가리였다니, 김 기자는 멸치대가리가 사진을 살렸다며 흐뭇한 표정을 감추지 못합니다.


'요즘 포즈'로 사진 촬영을 하는 어머님들의 모습. 여느 젊은이들 부럽지 않습니다. 김종진 기자 kjj1761@ '요즘 포즈'로 사진 촬영을 하는 어머님들의 모습. 여느 젊은이들 부럽지 않습니다. 김종진 기자 kjj1761@

홀로 사진을 찍으러 온 어머님부터 오순도순 손잡고 온 노부부, 친구들과 함께한 어머님들까지 30여 명의 주민이 사진관을 찾았습니다. 빨래방 직원들도 어머님, 아버님과 함께 포즈를 취해봅니다. 3개월 만에 ‘마을 손자’가 된 저희가 합류하자 어색함이 조금 덜해지셨는지 더욱 웃음꽃이 피어납니다. 언젠가 우리가 마을을 떠날 때 어머님, 아버님의 기억에 저희가 재밌는 일을 함께 했던 빨래방 손자, 손녀로 남았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이 가장 젊은 날

사진을 예쁘게 인화했습니다. 사진을 뽑으면 어머님, 아버님이 더 잘 보관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어머님, 사진 예쁘게 보정했어요.”

“에이, 뭐 하러 보정했어. 지금 주름 있고 쭈글쭈글해도 이 모습 그대로 간직하고 싶어. 지금이 좋아, 나는”

세월의 흔적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어머님의 모습에서 또 한 번 배웁니다.

남편의 여권 사진을 찾아간 어머님도 계셨습니다. 사진 찍기 싫다는 남편 대신, 남편의 여권을 가져오셨던 어머님입니다.

“이 여권 사진으로 영정 사진을 만들 수 있나?”라며 물으셨던 어머님은 “자식들한테 부담 덜어줘야 해. 우리 아저씨가 같이 왔으면 좋았겠지만 죽어도 안 온다는데 뭐, 기술 좋잖아”라며 사진 인화를 부탁하셨습니다. 자식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어머님의 마음에 뭉클함을 느꼈습니다.

사진을 찾아가는 한 어머님이 말했습니다.

“지금이 가장 내 인생에서 가장 젊은 날이야”

어머님 말씀에서 사진의 의미를 되새겨봅니다. 사진을 가지고 있는다는 게 자식의 부담을 덜어주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어머님, 아버님의 나이대에서 노년의 사진이 가진 무게감도 생각해봅니다. 이 글을 보시는 여러분들도 부모님과 할머니, 할아버지와 ‘젊은 사진관’에 가서 이번 주말 예쁜 인생 사진 한 장 어떨까요?


※본 취재는 부산광역시 지역신문발전지원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김준용 기자 jundragon@busan.com , 이상배 기자 sangbae@busan.com , 김보경 harufor@busan.com , 이재화 jhle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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