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장수국가' 대한민국, '골골백세' 안 되려면

박태우 기자 wideney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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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우 라이프부 차장

2000년대 중반 국내 양대 유제품 업체가 요구르트 이름을 두고 치열한 법정 다툼을 벌인 적이 있다. 이들 업체가 모두 자사 제품을 출시하면서 발효식품인 요구르트를 많이 마시는 불가리아의 국명을 딴 상품명을 붙였는데, 실제 불가리아산 유산균이 함유됐는지를 두고 양 사 간에 상표권 분쟁이 붙은 것이다. 이들 제품의 영향으로 국내에서는 불가리아가 동유럽의 장수 국가라는 이미지가 굳어지기도 했지만, 실제 불가리아인의 평균 수명은 경제 수준이 한참 앞서는 서유럽 평균에 못 미치는 게 현실이다. 앞으로는 오래 사는 데 유익한 건강식품이라는 광고 효과를 노리고 제품명에 나라 이름을 활용하겠다면 ‘불가리아’보다는 또 다른 발효식품 강국인 ‘대한민국’을 붙이는 게 더 나은 선택이 될 것 같다. 우리나라 인구의 평생 기대수명이 ‘전통의 장수국’인 일본에 이어 세계 2위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한국인 기대수명 83세, 日 이어 세계 2위

높은 보험 보장성으로 의료 문턱 낮아져

건강수명 제자리, 노인빈곤율 압도적 1위

준비 없이 방치하다 국가적 재앙될 수도


보건복지부가 지난달 발표한 ‘2022 OECD 보건통계’에 따르면 2020년 우리나라 국민의 기대수명은 83.5년을 기록했다. 남성이 80.5세, 여성은 86.5세로 예측됐다. 지금의 두 살 아이들은 평균적으로 한 세기를 넘어서 2103년까지 살 거라는 거다.

한국의 기대수명은 OECD 국가 평균(80.5년)보다 3년 긴 것으로, 1위인 일본(84.7년)에 이어 2위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이 기대수명의 증가 속도다. 2010년 한국인의 기대수명은 80.2년으로, 38개국 평균에 못 미치는 21위였으나, 10년 만에 3.3년 연장되면서 19계단이나 뛰어올랐다. 이 같은 추세라면 50년 뒤인 2070년에는 기대수명이 91.2세로, OECD 국가 중 가장 높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장수국가 대한민국’의 비결은 발효식품인 김치의 종주국이라거나 요구르트 섭취량이 늘었다는 등의 낭만적인 이유보다는 보다 현실적인 요인에서 기인한다. 눈부신 경제 성장 덕에 의식주 등 생활 전반에서 삶의 질이 높아졌고, 가까운 거리에 병·의원이 밀집해 있고, 고도로 효율화된 의료시스템에다 높은 건강보험 보장성으로 병원 문턱이 낮아졌기 때문이다. 몸에 조금만 이상이 느껴져도 병원을 찾을 만큼, 마트에서 쇼핑하는 것만큼이나 병원 진료를 받는 것이 일상화 됐다. 우리 국민 1인당 연간 외래 진료 횟수는 14.7회로, OECD 평균(연 5.9회)의 2.5배에 달한다. 입원환자 1인당 평균 재원일수 역시 19.1일로, OECD 평균 8.3일의 배가 넘었다.

건강하게 사는 ‘웰빙’에 대한 기대치가 높아지면서 건강 위험 요인에 대한 관리 수준도 향상됐다. 우리나라 1인당 연간 주류 소비량은 7.9L로 OECD 평균(8.4L)보다 적었고, 흡연율은 15.9%로 OECD 평균(16.0%)과 비슷했다.

하지만 이 같은 수명 증가가 축복이 될지 오히려 재앙이 될 지는 따져봐야 할 문제다. 장수 국가의 동전의 뒷면은 바로 노인 국가이기 때문이다. 우리 국민의 건강수명은 2020년 66.3년으로, 2012년(65.7년)에 비해 별반 나아지지 않았다. 기대 수명 83.5년 가운데 17.2년은 각종 병치레로 고생한다는 뜻이다. 65세 이상 노인의 절반이 3가지 이상의 만성질환에 시달리고, 10명 중 1명꼴로 치매를 앓고 있다. 늘어난 기대수명 만큼 건강한 삶을 누리지는 못하는 게 현실이다.

지난 6월 ‘전국노래자랑’의 마이크를 놓고 9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방송인 송해처럼 ‘9988234’의 꿈을 실현하려면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재정적인 뒷받침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그렇지만 지난해 우리나라 노인빈곤율은 43.4%로, OECD 회원국 평균(15.3%)을 상회하며 압도적인 1위를 기록했다. 이렇다보니 누구나 호텔식 서비스를 갖춘 최고급 실버타운에서의 여유롭고 품위 있는 노년을 꿈꾸지만, 현실은 하루 먹기 위해 굽은 허리로 폐지를 주우러 위험천만하게 도로를 가로지르는 처량한 노인들이 적지 않다. 생활이 피폐하고 만성 질환으로 삶의 질은 떨어지는데, 마음 편히 의지할 이도 없다 보니 노인자살율도 OECD 평균의 3배에 육박한다.

그렇다고 어르신들의 행복한 노년을 지켜드리기에 ‘나라 곳간’도 풍족하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건강보험과 국민연금 등 해가 다르게 고갈돼 가는 공적연금 재정은 미래 세대가 감당 불가능한 수준으로 그 부담이 불어나고 있다. 저출산 고령화로 이들 연금 지출은 연평균 8%씩 급증하고 있는데, 전문가들은 획기적인 재정 개혁 없이 현 추세를 손 놓고 방관하다가는 미래 성장 동력을 좀 먹는 것은 물론, 국가 존립마저 위태롭게 할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장수국가 대한민국’이 개인은 물론 국가 차원에서도 지금부터라도 면밀하게 노후 준비를 하지 않는 한 ‘골골백세 대한민국’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얘기다.


박태우 기자 wideney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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