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칼럼] 집에 에어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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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소희 공모 칼럼니스트

“집에 에어컨이 없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놀란다. “선풍기도 없다”고 하면 놀란 표정은, 정말 괜찮은 건지, 생활이 많이 어려운 건 아닌지 걱정하는 얼굴로 바뀐다. 에어컨이 없는 이유는 몇 가지 있다. 에어컨은 돈이 많이 든다. 구입 가격도 높고 전기료도 비싸다. 에어컨은 주로 여름에만 사용한다. 계절에 상관없이 사용하는 세탁기나 청소기와는 달리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기간이 상당하다. 같은 이유로 선풍기도 없다. 더위에 강한 편이기도 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환경을 생각한 결정이다.

에어컨을 가동할수록 실외기가 내뿜는 뜨거운 바람은 온실가스를 배출해 지구온난화를 야기한다. 지구가 뜨거워졌기 때문에 에어컨을 더 열심히 가동하고 지구는 더욱 뜨거워지는 악순환에 빠진다. 또한 요즘은 에어컨이 마치 가스레인지처럼 빌트인으로 설치되거나 주거 옵션에 자동으로 포함되는 경우가 많다. 에어컨을 샀다가 혹여 나중에 버려야 하는 과정에서 괜한 쓰레기를 만들면 이 역시 환경에 좋지 않기에 앞으로도 소유하지 않을 계획이다. 그렇다면 에어컨 없는 여름나기는 어떻게 가능할까.


환경 위해 에어컨 끄는 청년들

윤리 감수성과 참여 의식 높아

불편해도 꼭 지켜야 할 가치관

기업 포함 우리 모두에 요구돼

우월감 기댄 차별은 경계하며

사회적 연대로 변화 이끌어야


우선 여름은 더운 계절이라는 걸 새삼 상기할 필요가 있다. 원래 덥고 더우니까 여름이다. 에어컨 있는 여름나기가 쿨한 맛이라면 에어컨 없는 여름은 자연 맛이다. 방부제도 MSG도 들어가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맛은 처음에는 밋밋하고 심심하지만 나중엔 특유의 맛이 느껴지며 대개 소화도 잘되고 속도 편한 장점이 있다. 자연 맛 여름도 마찬가지다. 처음엔 괴로울 수 있지만 신기하게도 점차 몸이 적응한다.

맨몸으로 부딪혀 보니 여름이라고 다 같은 여름이 아니다. 실제로 에어컨이 필요할 만큼 무더운 기간은 대략 1주일 정도다. 이때는 정말 덥다. 본가로 피신하거나 시원한 카페로 대피하는 등 말 그대로 피서가 필요하다. 하지만 영원한 것은 없다. 더위는 결국 꺾인다. 매년 ‘이 또한 지나가리라’를 몸소 체험한 결과 어떤 시련이 와도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정신수양은 덤으로 얻는다.

유별난 나름의 환경운동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선뜻 권유할 자신은 없다. 다행스럽게도 더위를 잘 타지 않는 체질이라 지속할 수 있는 것 같다. 그렇지만 얼마 전 한 일간지에 소개된 지구를 지키려고 에어컨을 끈다는 청년들의 이야기에 동류의식을 느꼈다. 그들의 인터뷰에는 과연 환경보호에 앞장서고 의식적인 소비생활을 실천하는 것으로 알려진 요즘 세대의 특징이 명확히 담겨 있었다.

2030 세대는 도덕적인 책임을 중요시하고 사회 참여에도 적극적이다. 이러한 세대적 감수성은 과거에 단순히 이윤 극대화를 향했던 기업들의 움직임이 활동 반경을 넓혀 윤리적이고 사회적인 가치에도 기여하길 요구한다. 게다가 지금은 기업뿐만 아니라 모든 경제 주체에게 그 잣대가 확대 적용되는 것처럼 보인다. 예컨대 ‘싸이 흠뻑쇼’의 물 논란이 그러했고 개인들은 친환경, 무농약, 저탄소, 동물복지 등 소위 ‘착한 소비’를 통해 개념소비자가 되려는 욕구가 크다. 다만 이런 트렌드가 자칫 도덕적 우월감을 발현하는 통로가 되어서는 안 된다. 〈내 안의 차별주의자〉를 쓴 사회학자 라우라 비스뵈크는 경계 짓기와 소속감, 인정욕구를 목적으로 도덕적 우월감을 과시하고자 차별하는 행위는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람마다 민감한 주제가 다르기 때문에 통일적인 감수성을 기대하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에 가깝고 오히려 민주적이지 않을 수 있다. 개인적으로 환경보호를 외치며 텀블러와 장바구니를 챙기고 일회용품 사용을 지양하면서도, 부끄럽게 고백하지만, 종이 빨대는 여전히 환영하지 못하고 있다. 환경을 위해선 응당 종이 빨대를 수용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흐물거리는 종이 빨대를 마주할 때면 플라스틱 빨대가 그리워진다.

그럼에도 스스로를 성찰하고 겸손하게 만드는 젊은 세대의 높은 윤리적 기준과 독려에 불편함보다는 반가운 마음이 더 크다. 올해 1월 한 사극 드라마의 낙마 장면 촬영에서 불거진 동물학대 논란에 혼자 조용히 반성한 적이 있다. 평소 동물권에 관심이 많다고 생각했지만 말이 넘어지는 장면을 어떻게 연출했을지 논란이 일기 전에는 미처 고민해 보지 못했다. 시민단체 카라의 고발로 밝혀진 정황을 알고 난 후 수많은 시청자가 분노했다. 자신의 신념을 위해 애쓰는 활동가들의 존재에 감사했고 무엇보다 이런 문제 제기를 가볍게 지나치지 않는 청년 세대의 도덕적, 사회적 연대와 열정이 자리잡고 있었기에 빠른 공론화가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다.

수메르 점토판에 새겨진 ‘요즘 애들 버릇없다’는 말이 오늘날에도 유효할지는 몰라도, 버릇이 없어 고분고분 듣지 않고 소신 있는 행동을 주도하는 덕분에 우리 사회가 점점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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