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철의 어바웃 시티] 미래 사회의 나침반, 도시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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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대 도시공학과 교수

부산 비석마을·김해 고인돌 등
도시는 그 자체로 역사성 갖춰
미래 경쟁력에도 중요한 척도

1939년 영국의 고고학 발굴을 다룬 영화 ‘더 디그(The Dig)’에 인상 깊은 대사가 나온다. 역사는 “과거나 현재가 아닌 미래를 위한 일”이라는 것이다. 도시의 역사를 모르고는 인간의 역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인간 역사의 결과물이 곧 도시이기 때문에 도시의 역사를 이해하는 일은 도시 미래를 볼 수 있는 나침반이 된다. 도시의 역사에는 도시의 기원, 성장 과정, 공간 구조, 갈등 상황 등 다양한 측면이 모두 포함된다.

최근 부울경 지역에는 이와 관련된 흥미로운 이야기가 겹겹이 쏟아진다. 인기리에 방영된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 ‘소덕동 이야기’가 나온다. 마을을 관통하는 도로 건설에 마을 내 오래된 팽나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결국 도로가 우회한다는 설정이다. 실제 화제가 된 팽나무는 500년 된 수종으로 경남 창원시 대산면 북부리에 있다. 현실에서도 이 나무는 곧 천연기념물로 지정된다고 한다. 가치를 모르던 지역의 보물을 드라마가 일깨워 준 격이다. 드라마 인기 때문이기도 있지만 오래된 팽나무가 던져 주는 평화로움과 이를 직접 체험하려는 인파가 이곳으로 몰리고 있다.

드라마의 우영우 변호사가 보면 좋아했을 고래 그림으로 유명한 울산의 반구대 암각화도 지역을 넘어 나라의 소중한 보물이다. 1995년 지정된 국보임에도 한때 수몰되면서 훼손이 반복된 끝에 멸실될 위기에 처해 있다. 태화강 지류 대곡천 암벽에 새겨진 이 암각화는 신석기 시대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돼 세계 포경의 역사를 새로 썼다고 한다. 최근에 와서 이 암각화의 역사적 가치가 급격히 올라가고 있음에도 지역의 식수 문제로 인해 여전히 훼손 위험이 있다고 하니 안타까운 마음이다.

아쉬운 소식은 경남 김해시에도 있었다. 2006년 김해시 구산동 택지지구 개발 사업 당시 발굴된 세계 최대 규모의 고인돌인 지석묘가 정비 공사 과정에서 훼손됐다. 학계에 따르면 덮개돌인 상석의 무게만 350톤에 이르고, 고인돌을 중심으로 한 묘역 시설이 1615㎡에 달하는 이 유적은 가야문화 이해에 핵심 유물이라고 한다. 세계 최대의 고인돌이 있는 도시로서의 자부심에 상처가 난 김해시민들은 속상해하고 있다.

부산에도 안타까운 소식이 있었다. 국내 대표적인 피란 유적인 부산 서구의 ‘아미동 비석마을’ 내 일부를 철거한다는 것이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가 추진 중인 비석마을의 다른 구역은 보존된다고 하니 그나마 다행이다. 하지만 철거되는 구역도 문화와 역사를 보존하면서 지역 내 주거 환경을 개선할 수 있는 종합 대책이 마련되었으면 한다. 구한말 일본인들을 위한 화장장과 공동묘지 위에 해방 이후 한국전쟁과 피란 시절을 거치면서 조성된 비석마을은 그 자체로서 부산 도시 역사의 산증인이라 할 수 있다.

유럽은 말할 것도 없고 역사가 그리 길지 않은 미국에서도 도시 역사는 그 자체로 도시를 알릴 수 있는 자원으로 인식되고 있다. 스페인에 의해 개발된 최초의 식민도시였던 미국 동남부 연안 서배너시는 격자형 도로를 중심으로 나무들로 뒤덮인 곳이다. 격자 중심지에는 소규모 공원이 있고, 지역의 유명한 지도자들 무덤도 있다.

최근 이곳에는 소규모 공원의 야간 무덤투어가 연중 주말마다 열린다. 많은 방문객 인파가 몰리면서 지역 내 새로운 명소로 떠오르고 있다. 미국 북서부 첨단기술 중심지인 시애틀도 오래된 다운타운을 중심으로 역사투어가 한창 진행 중이다. 요즘 사회경제적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시애틀은 근대 도시개발 이후 대화재를 여러 번 겪었는데, 도시를 재건할 당시 파괴된 도시를 덮고 그 위에 새 도시를 건설하면서 그 아래에는 아무도 살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최근 도시 아래의 지하 부분에 투어를 진행하면서 많은 탐방객을 불러 모으고 있다.

인간의 역사가 그렇듯이 도시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도시는 단순히 물리적 기반 시설로만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사람들이 살고, 사는 그곳에서 역사가 만들어진다. 물리적 시설에도 역사성이 있다. 근대 산업유산도 그런 이유로 우리가 지켜 가고 보존해야 할 이유가 된다. 온전히 역사 그 자체를 소중히 여기고 다양한 가치가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한다. 그래야만 그 도시는 살아 있고, 또 살 만한 곳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도시는 역사’다.

도시의 가치는 번쩍이고 화려한 데 있기보다 역사, 문화, 환경 등 이야깃거리가 있는 곳에서 빛난다. 근대화 이후 편리함과 경제적 효율로 상징되던 도시개발에 스토리텔링이 새로운 가치로 요구되고 있다. 이러한 다양한 가치를 어떻게 융합할 것인가가 도시의 미래 경쟁력에 중요한 척도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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