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여는 시] 시간의 얼굴을 보면/이은주(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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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과 2사이에 촘촘한 구멍이 있어 잘디잘게 부서진 검은 빛이 울컥거리며 새어나오지 3과 4는 빛을 움켜잡기 위해 부단히 움직이지 아주 가끔씩 여지를 주는 듯해 그 속임수에 놀아나는 것을 알면서도 구멍 너머를 넘볼 수밖에 없어 3과 4로 턱없이 부족해 5와 6을 깨워야 한다는 것을 알지 아니 안다는 게 아냐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는 거지 7과 8은 계약이므로 의무적이지 8까지 흘러왔다고 해서 이뤘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해이며 자위에 다름 아냐 9와 10까지 애를 써야 해 눈을 감아선 안 돼 11까지를 걸고 12를 낚아채야 해 그래서 미끄러질 때까지 질퍽해져 보는거야

12너머 그 어디쯤, 13이어도 괜찮을 구멍과 열쇠, 그 다른 이름이어도, 그 이름을 찾을 때까지, 다시 1과 2 사이의 검은 빛 안으로 돌진할거야

- 문예지 〈시에〉(2012년 봄호) 중에서


이탈리아 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는 시간은 높은 산에서 더 빨리, 더 느리게 흐른다는 것을 시계로 측정할 수 있음을 그의 저서에서 밝혔다. 시간조차 공평하지 않다는 것. 시인은 이 시간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시간과 시간 사이에 있는 구멍과 빛과 계약과 의무와 미끄러짐을 강박적으로 호명하고 있다. 시간이란 무엇일까. 시인은 왜 ‘검은 빛’이라는 빛을 시어로 생각해 냈을까. 1과 2 사이에 9와 10 사이에 차들이 지나가고 비가 내리고 음식 냄새가 나고 그리움이라는 이상한 감정도 생긴다. 숫자가 흐르는 듯한 이 시를 읽으니, 인간의 시간이야말로 거대한 신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성윤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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