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손맛’이 좌우… 한여름에도 찜기 더위 속에 어묵 튀겨

박혜랑 기자 rang@busan.com , 최세헌 기자 corni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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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기획] 당신이 모르는 수산 아지매

어묵 수제 기술자

권금채 씨는 2002년부터 각종 수제어묵을 만들어 온 베테랑 작업자이다. 권금채 씨는 2002년부터 각종 수제어묵을 만들어 온 베테랑 작업자이다.

약 10년 전부터 베이커리형 부산어묵 매장들이 등장하면서 어묵은 부산의 대표적 먹거리로 떠올랐다. 지금은 생선손질, 배합, 성형, 튀기기 과정 모두 기계화 됐지만,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배합을 제외하곤 전부 수작업으로 진행됐다. 부산연구원이 펴낸 〈부산어묵사〉에 따르면 광복 이후 부산에서 일본인들이 세웠던 어묵 공장에서 근무하며 기술을 배우고 익힌 한국인 기술자들에 의해 1953년 본격적으로 어묵 생산이 시작됐다. 기계화된 것은 불과 10여 년에 지나지 않았고, 2000대 초반까지도 사람이 직접 어묵을 만들어냈다. 주로 모양을 잡고 튀기는 작업에 여성 작업자들이 투입됐다.

어묵이 이렇게 알려지기 전 어묵공장들은 판잣집 형태의 작은 규모에서 출발했다. 배합된 어육은 사람 손으로 모양을 잡아야 했다. 지금처럼 어묵의 종류가 다양하지 않지만, 고급 어묵이 들어가는 오말이(500원에 팔았다해서 붙은 이름), 그보다 밀가루가 많이 들어가는 삼말이(300원에 팔렸다 해서 붙은 이름), 요리평, 오볼(오징어 볼) 등을 모두 수제로 만들었다. 단순한 모양의 사각 어묵 성형만 기계가 했다. 부산에서 가장 오래된 어묵회사인 삼진어묵 공장에서 20년 넘게 근무한 권금채(64) 씨는 “특히 가장 힘들었던 것은 각종 부재료를 넣어 튀기는 ‘요리평’이었다. 속이 텅 빈 구운 어묵을 반으로 잘라 엄지와 검지로 잡아 펼치고 그 위에 다시 수십 번 칼집을 내어 반죽을 붙여 다시 튀겨내야 했다”고 기억했다. 이런 작업을 하루 8시간 넘게 반복하면서 익숙해진 손가락이 둥글게 굽기도 했다. 지금이면 15분이면 하는 작업을 당시에는 2시간이 걸렸다. 명절이라도 끼여 있는 날이면 24시간 근무는 예사였다. 게다가 수작업이라도 중량을 맞춰야 했기에 숙련된 작업자들이 아니면 무게를 정확하게 맞출 수 없었다.

특히 가장 작업자들을 힘들게 했던 건 공장 안의 열기다. 지금 부산 사하구 장림 어묵공장에는 배합, 찜기, 성형 등의 모든 공정 공간이 분리돼 있지만 그전까지는 모든 과정이 한 공간에 있어, 찜기의 더위를 온몸으로 맞으면서 일해야 했다. 명절 때는 24시간 일하면서 7분마다 찜기에서 어묵을 쪄 내느라 작업복은 흠뻑 젖어 여러 번 갈아입는 건 예사였다. 권 씨는 “겨울에도 더운데 여름이면 성형된 어묵을 7분마다 찜기에서 꺼내서 다시 튀기는 작업은 말 그대로 지옥이었다”며 “초반에는 판잣집 형태의 공장에서 일했는데, 비닐천막 아래서 작업을 하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이처럼 숙련된 작업자들 덕에 전면 기계화도 가능했다. 삼진어묵은 2014년 공장을 장림 등지로 옮기면서 기계를 도입했다. 당시만 해도 어묵 공장이 많지 않았기에, 기계를 제작할 때도 현장 작업자들의 조언이 크게 작용했다. 권 씨는 “처음 기계를 들어올 때도 어떤 공정이 필요한지 등의 의견을 통해 기계 발주 제작에도 참여했다. 권 씨는 “우리들이 작업에 대해 가장 잘 안다. 기계도 우리가 없었다면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결국 수십 년간 더위와 싸워 가며 손으로 만들어 온 작업자들이 있었기에 어묵의 대중화도 이뤄졌다고 강조했다.

어묵 크로켓(고로케) 등 어묵의 대중화를 이끈 신제품 개발에도 공장을 지킨 작업자들이 의견을 보탰다. 만두와 돈까스에서 착안된 어묵 고로케 반죽과 모양, 식감 등을 모두 직원들과 의견을 나누면서 만들었다. 권 씨는 “대표의 훌륭한 아이디어가 있었지만, 현장을 잘 아는 사람들의 공도 크다고 생각한다”며 ’가내수공업에 지나지 않았던 어묵이 이렇게 시장이 커진 걸 보면 작업자로서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했다.


박혜랑 기자 rang@busan.com , 최세헌 기자 corni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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