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칼럼] ‘혐생’을 버티는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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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영은 공모 칼럼니스트

“인생은 한 번뿐이라고? 잘 들어, 정 대리. 죽는 순간이 단 한 번뿐이지 우리 인생은 매일매일이야.” 요즘 화제의 책인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이하 〈김 부장 이야기〉)에 등장하는 구절이다. 이 책은 이 시대 직장인들의 현실을 고증한 소설이자 에세이다. 다양한 등장인물 속에서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은 정 대리다. 인플루언서 여자친구와 결혼을 앞둔 정 대리는 ‘욜로족’(한번 사는 인생 하고 싶은 거 다 한다는 라이프 스타일)을 고수하며 갖고 싶은 물건과 먹고 싶은 음식을 몽땅 사들이는 화끈한 인물이다. 직장 선배이자 인생 선배는 그에게 이렇게 조언한다. “인생은 한 번 사는 게 아니라 매일매일 사는 거라고.”

정 대리가 그걸 몰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잠시 현실을 잊게 할 무언가가 필요했던 거다. 요즘 인터넷에서 자주 보이는 말 중에 ‘혐생’이라는 단어가 있다. ‘혐오스러운 인생’의 줄임말이다. 인생을 혐오스럽다고 표현하는 게 슬프기도 하지만, 왠지 공감이 가기도 하는 게 사실이다. 이 시대의 정 대리들은 혐생을 살아 내고, 또 혐생을 버틸 무언가를 찾는다. 삶을 버틸 수 있는 활력소를 찾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하다. 최근 트위터 검색엔진을 이용하다가 정말 많은 사람이 각자의 혐생을 버틸 만한 다양한 취미를 누리고 있다는 걸 알고 놀랐던 기억이 있다. 마음만 먹으면 배울 수 있고, 볼 수 있고, 즐길 수 있는 시대다.

인생 혐오에 빠진 젊은이들

다양한 취미와 쾌락 누려 봐도

남는 건 사회적 단절과 고립

 

혐생을 버티는 힘의 근원은

현실을 회피 않고 마주하는 용기

소중한 ‘현생’ 껴안아야 성장

다만 정 대리가 자신의 통장 잔고를 외면했듯, 지나친 쾌락 추구는 분명 크고 작은 현실 문제를 낳는다. 이런 현상을 가장 잘 보여 주는 매개체가 바로 미디어다. 유튜브 속 몇 백만 원짜리 ‘하울’(구매한 물건을 리뷰하는 콘텐츠) 영상은 과소비를 부추겼고, 야심한 시각 기름진 곱창 먹방은 욕망을 불렀다. 늘어나는 음주 방송을 보며 ‘하루쯤은 내일이 없는 것처럼 마셔도 되지 않을까’ 싶을 때가 있다. 정신을 차려 보면 야식 먹고 속 쓰려 고생하고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을 사서 후회하는 나를 발견할 수 있다. 현실을 살기 위해 누리는 건지, 누리기 위해 현실을 사는 건지 헷갈리는 순간도 있다.

혐생이라는 단어는 우리의 현실을 꿰뚫지만, 현실을 회피하고 단절하게 만드는 치명적 단점을 갖고 있다. 온라인에서 ‘혐생 살다 올게요’, ‘혐생 잊게 만듭니다’ 등으로 활용되는 모습만 봐도 그렇다. ‘현생’을 혐생이라고 규정하는 순간부터 본능적으로 도피처를 찾게 된다. 그러나 야식을 배불리 먹어도, 술을 마셔도, 카드를 긁어 대도, 〈김 부장 이야기〉의 직장 선배가 했던 말처럼, 인생은 지속된다.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뜨고 하루하루가 계속 이어지는 게 삶이다. 잠깐의 쾌락으로 사라지지 않는다는 걸 우리는 안다.

최근 청년들의 고립감에 대한 뉴스가 많이 등장했다. 증가하는 2030세대 자살률의 가장 큰 원인을 ‘사회적 고립감’으로 꼽은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조사가 발표됐기 때문으로 보인다. ‘사회적 고립감’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왠지 방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두문불출하는 이미지가 떠오르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 용어는 그런 모습보다 더 넓은 범위의 이미지를 포함한다고 생각한다. 사회적 고립감은 현생을 혐생이라 생각하는 모든 사람에게 찾아올 수 있다. 대기업에서 잘나가는 정 대리에게도, 인스타그램에 멋진 사진을 올리는 대학 동기에게도, 취미 활동에 열심인 친구에게도 말이다. 어쩌면 현생에서 도피하려 더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하는 이들이 사회적 고립감을 가장 강하게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을 만나는 횟수나 대화 내용을 토대로 사회적 고립감을 조사하는 것도 방법이지만, 현실을 얼마나 회피하고 있는지를 점검하게 하는 것도 사회적 고립감이 팽배한 현실을 파악하고 해결책을 모색하는 데 좋은 방안이 될 거라 생각한다. 단순히 물리적으로 고립된 것뿐만 아니라 현실을 회피하고 단절하고 싶은 심리적인 고립이 청년들의 삶을 더욱 힘들게 만들기도 한다. 삶을 회피한다는 건 자신의 인생에서 자신을 고립시키는 행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혐생을 버티는 힘은, 단절하거나 회피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아니라 결국 또다시 ‘현생’이다. 끝이 없는 경쟁 사회에, 내 자리 하나 없는 것 같은 현실에, 먹고살기 바쁜 오늘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시 현생으로 돌아와야 한다. 현생 없이는 즐거움도, 행복도, 기쁨도 없기 때문이다.

〈김 부장 이야기〉의 정 대리는 결국 자신의 현실을 마주하고 과소비가 낳은 결과에 책임을 지며 한 단계 성장한다. 정 대리는 현생에서 도피하면 행복할 거라 착각했지만 현생 없이는 혐생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정 대리를 통해 나를 보고 우리를 본다. 우리의 혐생도 결국 소중한 현생이기에, 당신의 현생을 응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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