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익의 참살이 인문학] 이(利)로움과 의(義)로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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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칼럼니스트

인간의 본성은 이익을 좇기 마련
내 속의 욕망 인정하고 천명해야
의로움 속 공정한 사회질서 가능

맹자는 공자와 더불어 동아시아 사람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과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가치관을 제공해 준 중요한 사상가다. 공자가 어짊(仁)을 강조했다면 맹자는 그 위에 의로움(義)을 세우고자 했다. 그의 사상과 언행을 담은 〈맹자〉의 첫머리에는 그가 양나라 혜왕과 나눈 대화가 기록되어 있다. 맹자는 전쟁과 살육이 일상이던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천하를 주유하면서 자신의 사상을 받아들이고 실천할 유력한 군주를 찾고 있었다. 그가 양 혜왕을 만난 것도 그런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기대는 왕의 첫 질문에서부터 어긋나고 만다. “노인장께서 천 리를 멀다 않고 와 주셨는데 아마 이 나라를 이롭게 할 방안을 갖고 계시겠지요?” 이에 대한 맹자의 대답에는 실망과 질책이 한가득이다. “왕의 말이라면 오직 인의(仁義)일 따름인데 하필이면 이익을 운운한단 말이외까!”


맹자의 실망과 질책은 당시는 말할 것도 없고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아도 상식과 어울리지 않는다. 전국시대의 왕이 나라의 이익을 챙기고 자본주의 세상의 개인이 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 아닌가.

맹자의 논리는 이랬다. 왕이 나라의 이익을 생각하면 대부는 가문의 이익을 챙기고 선비(士)와 서민은 한 몸의 이로움을 추구하기 마련이다. 위아래가 서로 이익을 다투면 나라는 위태로워지기 마련이다. 의(義)를 뒤로하고 이(利)를 앞세우면 윗사람 것을 빼앗지 않곤 만족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주장이 어떻게 의로움이 이로움을 이길 수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 논증으로 나아가지는 않는다.

유전과학과 자본주의 시대의 상식은 정확히 이와 반대 방향으로 작동한다. 생명의 가장 작은 단위인 유전자는 살아남아 자신과 똑같은 복제자를 많이 남기는 것이 유일한 존재 이유다. 유전자는 유기체의 몸을 떠나서는 살 수 없으므로, 유기체가 살아남아 자손을 많이 남기는 것이 유전자에게도 이롭다. 따라서 각 유전자는 자신의 복제자를 가장 많이 생산하는 방향으로 유기체의 행동을 조정한다. 이 과정에서 유전자들끼리의 경쟁이 벌어지는데, 경쟁에 이겨 유기체를 지배하는 유전자만이 살아남는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이기적 유전자의 행동 방식이다. 이 논리에 따르면 우리의 식욕과 성욕과 명예욕도, 살아남아 자신의 복제자를 생산하도록 우리를 이끄는 이기적 유전자가 만들어 낸 생리 현상이다. 이 구도에서는 모든 존재자가 자신의 이로움을 추구할 뿐 의로움은 아예 있지도 않다.

우리의 몸과 그 몸의 주인인 사람도 이기적 유전자의 속성을 본받아 이기적으로 행동한다고 전제된다. 〈이기적 유전자〉는 끝부분에서 인간만이 이기적 유전자의 독재에 항거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는 말을 덧붙이지만, 그 말에 주의를 기울이는 독자는 거의 없다. 이기적 유전자의 논리를 모든 인간과 사회 현상에 적용하면 생물학으로 모든 학문과 삶을 통섭(統攝)할 수 있다는 사회생물학이 된다. 이 논리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동해도 사회의 질서는 유지된다는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한 믿음을 배경으로 한다. 이(利)를 추구하면 의(義)는 자연히 달성된다는 검증되지 않은 이데올로기다. 이처럼 이기적 유전자와 통섭은 정확히 맹자와 반대 방향을 취한다. 전자는 이기적 본성의 과학이자 이데올로기이며 후자는 선한 본성이 전제된 정치이념이다. 하지만 인간의 본성이 선(善)이냐 악(惡)이냐의 논쟁은 부질없다. 인간 본성에 대한 논쟁보다는 어떻게 하면 선한 본성이 발현될 환경을 만들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이 훨씬 더 절실하기 때문이다.

〈이기적 유전자〉 이후의 생물학은 고정된 본성이 아닌 문화와 함께 진화해 온 ‘양육을 통한 본성(Nature via Nurture)’을 발견했다. 이와 의는 서로를 배척하지 않는다. 이를 통해 의를 얻기도 하고 의를 통해 이를 달성할 수도 있다. 문제는 이를 의로 혼동하거나 의를 말하면서 이를 추구하는 위선이다. 우리는 누구나 이익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하지만 의가 없으면 공정한 이의 추구도 불가능하다. ‘의를 통한 이’가 구현되는 세상이 우리의 목표다. 의는 이를 추구하는 내 속의 욕망을 인정하고 천명함과 더불어 시작된다. 누구나 어떤 결정이나 제안을 할 때 그 속에 담긴 자신의 욕망과 이익을 돌아보고 천명하도록 하는 이해관계 실명제가 필요하다. 논문을 발표할 때 논문의 내용에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를 이해관계를 밝히도록 하는 제도를 참고할 수 있다.

누가 보아도 표절이 거의 확실한 권력자 부인의 논문을 어떤 설명도 없이 표절이 아니라 판정한 대학은 어떤 이로움과 의로움을 위해 그렇게 결정했는지 만천하에 공개해야 한다. ‘사슴을 가리키며 말이라 우겨야만 하는’(指鹿爲馬) 세상은 결코 의로운 세상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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