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FF 상영작 리뷰] 제임스 그레이 ‘아마겟돈 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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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다를 것 없는 이야기에서 마주한 적나라한 미국의 자화상

영화 ‘아마겟돈 타임’ 스틸 컷. 유니버설 픽쳐스 제공 영화 ‘아마겟돈 타임’ 스틸 컷. 유니버설 픽쳐스 제공

사실 제임스 그레이의 영화엔 덧붙일 말이 그리 많지 않다. 그레이는 유별나게 스타일이 돋보이는 감독이 아니며, 그렇다고 독특한 소재나 테마에 천착하는 감독도 아니다. 또 그가 미국 이민자 역사와 갱스터 누아르, SF와 어드벤처, 그리고 멜로드라마 등 다양한 세계관을 다뤄 왔지만, 그런 소재들을 과시적으로 스펙터클화 하는 데도 별 관심이 없었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먼저 말하자면, 그래서 제임스 그레이가 그저 평범한 미국 감독 중 하나란 뜻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그레이의 영화는 이렇다 할 외형적 특징이 딱히 없음에도 21세기 영화가 다다를 수 있는 아름다움의 한 정점을 구현해 낸다. 올해 BIFF를 찾아온 그의 신작 ‘아마겟돈 타임’과 함께 이에 관해 짧게 말해 보려 한다.


12살 아이 시선으로 본 1980년

외로움·무력감·실패 읽어 내


폴 그라프는 뉴욕에 살며 러시아계 이민가정에서 자란 소년이다. 폴은 그림을 그리고 싶어 하고, 할아버지를 좋아하며, 반찬 투정을 일삼고 한 번씩 친구와의 일탈을 즐기는 평범한 12살 아이다. 그리고 이런 폴의 주변엔 1980년 레이건의 당선, 구겐하임미술관, 뉴욕 퀸스의 공립학교와 사립학교, 흑인과 유럽 이민자와 백인이란 차이와 그런 차이에서 비롯된 사회적 계급차 등이 둘러싸고 있다. 폴은 공립학교에서 사귄 조니와 우정을 나누지만, 폴의 가족은 그가 모범생이 되길 원해 교칙이 엄한 사립학교로 전학시킨다.

새로운 학교엔 이전과 달리 컴퓨터가 설치되어 있고, 우월주의가 팽배하며, 부유함과 여유가 흐른다. 학생들은 조회에서 공공연히 레이건을 지지하고, 차별적 발언을 서슴지 않는다. 그리고 폴은 이런 변화 속에서 혼란을 겪는다. ‘아마겟돈 타임’의 대략적인 배경이다.

이렇게만 요약하면 이 영화가 12살 아이의 시선을 빌려 미국적 보수주의 속에 내재된 이면을 묘사하는 정치-역사적 드라마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게 아주 틀린 설명은 아니며, 영화도 그런 정치성을 딱히 감출 생각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그레이는 상술한 혼란스러움과 모순을 세심히 묘사하면서 동시에 그 속에 내던져진 한 아이의 내면을 유심히 들여다본다. 그러니까 그림을 그리고 싶지만 그걸 진지하게 꿈꿀 수 없는, 마음 맞는 친구를 만났지만 그와 우정을 지속할 수 없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머리론 알지만 도저히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 모르겠는, 한 아이의 얼굴과 마음과 몸짓들, 그리고 거기에 새겨진 어떤 외로움 같은 것 말이다.

그리고 이 영화의 특별함이 여기에 있다. ‘아마겟돈 타임’은 별다를 것 없는 1980년대 한 중산층 가정에서 자란 한 아이의, 별다를 것도 없는 이야기를 그린다. 하지만 누구나 겪는 이 이야기 속에서, 어떤 장르적 서스펜스도 없이, 우리는 적나라한 미국의 한 자화상을 마주한다.

그리고 그 자화상 속의 한 아이가 겪는 고독과 외로움, 일상적 무력감과 관계의 실패를 함께 마주한다. 그렇게 ‘아마겟돈 타임’은 다분히 사적이고 사소한 순간을 세밀히 묘사하는 주관적 추상화인 동시에 그 세계의 지도를 냉철하고 정확히 풍경화하는 객관적 지도가 된다. 우리의 실패와 외로움은 어디서 비롯될까? 어쩌면 그레이의 소박하고도 아름다운 영화가 작은 답을 줄지도 모르겠다.

구형준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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