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영국의 오바마'

강윤경 기자 kyk93@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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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헌군주제 나라 영국에서 애초 총리는 왕의 살림살이나 돌보던 집사장이었다. 1721년 초대 총리 로버트 월폴이 바로 국왕 조지 2세의 집사장이었다. 공식 명칭은 제1재무경. 총리 관저 ‘다우닝가 10번지’가 런던 도심 거리의 평범한 주택인 것도 이런 역사적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검은 대문의 황금 명판에 지금도 ‘First Lord of the Treasury’(제1재무경)라 새겨져 있다. 그러나 근대 국가 체제가 자리 잡으며 대영제국 시절 세계의 총리로 불릴 만큼 국제적 영향력을 지닌 직함이 됐다. 지금도 유엔 상임이사국인 강대국 수장으로서 영향력이 상당하다.

인도 이민자 가정 출신 리시 수낵 전 재무장관이 영국 새 총리에 올랐다. 집권 보수당 대표 경선에 단독 입후보해 총리로 확정된 것이다. 301년 역사에 첫 비백인으로 대영제국 옛 식민지 출신 총리라는 새 역사를 썼다. ‘영국의 오바마’가 탄생한 것이다. 만 42세로 210년 만의 최연소 총리 기록도 세웠다. 이런 배경과 달리 그는 영국 사회의 전형적 엘리트 정치인이다. 의사 아버지와 약사 어머니 밑에서 자란 금수저로 명문 윈체스터 칼리지와 옥스퍼드대 PPE(철학·정치·경제학), 미국 스탠퍼드대 MBA 등 엘리트 교육을 받았다. 아내 악샤타는 ‘인도의 빌 게이츠’ 나라야나 무르티 인포시스 창업자의 딸이다. 수낵 부부의 총자산은 1조 1560억 원으로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 수반에도 올랐다.

35세에 하원 의원으로 정치에 입문한 그를 재무장관에 파격 발탁하며 거물 정치인으로 키운 건 ‘파티 스캔들’로 불명예 퇴진한 보리스 존슨 전 총리였다. 더벅머리 존슨과 대별되는 깔끔한 용모에 절제된 언행의 젊은 동양계 재무장관에 국민들의 관심이 쏠렸고 ‘미래 총리감’이라는 말들이 오갔다. 존슨 낙마 후 리즈 트러스와 총리 경쟁을 벌였는데 ‘슈퍼리치’가 약자 코스프레한다는 역풍에 존슨 총리 낙마에 앞장섰다는 배신자 프레임까지 더해져 당원 투표에서 밀렸다.

부자 감세 실패로 최단명(45일) 기록을 세우며 트러스가 물러나자 증세를 주장했던 그에게 반전의 기회가 주어졌다. 그러나 2016년 브렉시트 이후 총리가 4번이나 낙마하는 등 자중지란에 빠진 보수당을 제대로 이끌지는 미지수다. 가디언은 보수당이 2025년 총선에서 승리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암울한 전망을 내놓았다. 영국의 첫 여성 총리 대처처럼 첫 비백인 총리인 수낵이 혼란에 빠진 영국을 구할 수 있을지 세계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강윤경 기자 kyk93@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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