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 지금이 ‘골든 타임’…이대로는 미래 없다”

남유정 기자 honeybee@busan.com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코로나 엔데믹 1년…한국 영화계 여전히 ‘보릿고개’
수천억 시장 매출 증발·신작 투자 난항…‘악순환’
박스오피스는 ‘외화 잔치’…5위 내엔 ‘리바운드’뿐
“홀드백 붕괴·극장 관람료 상승 극장 정상화 늦춰”

코로나 팬데믹 이후 한국 영화 가운데 유일하게 천만 관객을 모은 ‘범죄도시2’ 포스터. 정부가 지난해 사회적 거리두기를 해제한지 1년이 지났지만, 침체한 한국 영화산업은 좀처럼 활기를 찾지 못하고 있다. 연합뉴스 코로나 팬데믹 이후 한국 영화 가운데 유일하게 천만 관객을 모은 ‘범죄도시2’ 포스터. 정부가 지난해 사회적 거리두기를 해제한지 1년이 지났지만, 침체한 한국 영화산업은 좀처럼 활기를 찾지 못하고 있다. 연합뉴스

‘9.2%’. 올해 2월 한국 영화가 기록한 매출액은 2019년 2월 대비 10분의 1로 쪼그라들었다. 정부가 사회적 거리두기를 해제한 지 1년이 지났지만, 침체한 한국 영화산업은 좀처럼 활기를 못 찾고 있다. 수천억 규모의 시장 매출은 증발했고, 영화 투자도 난항을 겪고 있다. 영화계에선 한국 영화를 되살릴 ‘골든타임’을 놓치면 국내 영화산업 자체가 고사할 수 있다는 위기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11일 영화업계에 따르면 제작을 마친 뒤 개봉 일을 못 정한 한국 영화는 90여 편에 이른다. 이달로 개봉 일을 정한 ‘리바운드’ ‘킬링 로맨스’ ‘드림’과 다음 달부터 공개되는 마동석 주연의 ‘범죄도시3’, 류승완 감독의 범죄영화 ‘밀수’, 강제규 감독의 ‘1947 보스톤’ 외엔 대다수의 작품이 개봉 시기를 잡지 못했다.

영화 ‘리바운드’ 스틸 컷. 바른손이앤에이 제공 영화 ‘리바운드’ 스틸 컷. 바른손이앤에이 제공
영화 ‘킬링 로맨스’ 스틸 컷.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영화 ‘킬링 로맨스’ 스틸 컷.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영화 ‘드림’ 스틸 컷. 플러스엠엔터테인먼트 제공 영화 ‘드림’ 스틸 컷. 플러스엠엔터테인먼트 제공

한국 영화계의 침체는 통계로도 산출된다.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집계를 보면 올 2월 한국 영화 매출 점유율은 19.5%, 관객 점유율은 19.8%였다. 이는 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이 만들어진 2004년 이후 2월 최저치다. 올 2월 한국 영화 관객 수는 127만 명으로 2019년 2월의 7.4% 수준이었다. 설 대목을 겨냥한 ‘교섭’과 ‘유령’은 물론 ‘카운트’ ‘대외비’ 등도 줄줄이 손익분기점을 넘지 못했다. 관객이 없으니 영화를 풀 수가 없고, 풀지 않으니 볼 영화가 없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상황이다.

한국영화감독조합 윤제균 공동 대표는 “새로운 영화가 투자를 받아서 촬영에 들어가는 경우가 정말 드물다”며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어 해결책을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익명을 요청한 국내 투자·배급사 관계자도 “일부 회사를 제외하곤 새로운 논의가 거의 멈춘 상태”라고 귀띔했다.

애니메이션 ‘더 퍼스트 슬램덩크’ 스틸 컷. NEW 제공 애니메이션 ‘더 퍼스트 슬램덩크’ 스틸 컷. NEW 제공
애니메이션 ‘스즈메의 문단속’ 스틸 컷. 미디어캐슬 제공 애니메이션 ‘스즈메의 문단속’ 스틸 컷. 미디어캐슬 제공

국내 박스오피스는 외화가 점령한 지 오래다. 올 초 일본 애니메이션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장기간 선두를 달렸고, ‘스즈메의 문단속’이 배턴을 이어받았다. 지난달 개봉한 ‘스즈메의 문단속’은 한 달 넘게 박스오피스 정상에 올라 있다. 11일 기준 박스오피스 5위권 내 한국 영화는 부산 중앙고 실화를 다룬 ‘리바운드’ 단 한 편이다. 3위는 마이클 조던을 그린 미국 영화 ‘에어’, 5위는 미국 액션 영화 ‘던전 앤 드래곤: 도적들의 명예’다. 한국 영화계가 안방에서 벌어진 ‘외화 잔치’를 씁쓸하게 지켜보는 상황이 된 셈이다.

박기용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장은 “국내 영화산업 자체가 무너지게 생겼다”며 “골든타임을 놓쳐서 위기가 고착화하면 이후엔 어떤 수를 써도 회생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봤다. 그는 이어 “최근 개봉한 한국 영화 ‘리바운드’의 실제 관람객 평가가 좋은걸로 알고 있다”면서도 “선순환 구조가 이뤄진 정상적인 환경에서 개봉했으면 관객을 더 모았을 작품이라 영화계 정상화가 시급하다”고 했다.

황정민 현빈 주연의 영화 ‘교섭’ 스틸 컷. 플러스엠엔터테인먼트 제공 황정민 현빈 주연의 영화 ‘교섭’ 스틸 컷. 플러스엠엔터테인먼트 제공
배우 조진웅 이성민이 나선 영화 ‘대외비’ 스틸 컷. 플러스엠엔터테인먼트 제공 배우 조진웅 이성민이 나선 영화 ‘대외비’ 스틸 컷. 플러스엠엔터테인먼트 제공

영화계에선 ‘홀드백’ 붕괴와 ‘극장 관람료 인상’을 극장 정상화를 늦추고 있는 요인으로 보고 있다. 홀드백은 극장 상영이 끝난 후 다른 플랫폼 출시까지 걸리는 기간을 말한다. 관행적으로 45일이 지켜져 왔다. 하지만 팬데믹 이후엔 짧으면 2주에서 길면 한 달 정도로 확 줄었다. 부산에 사는 이정원(32) 씨는 “영화 한 편 관람료면 OTT 두 개를 한 달 동안 구독할 수 있다”며 “조금만 기다리면 OTT에서 볼 수 있어서 굳이 극장에 갈 필요를 못 느끼고 있다”고 했다.


영화 ‘에어’ 스틸 컷. 워너브러더스코리아 제공 영화 ‘에어’ 스틸 컷. 워너브러더스코리아 제공
영화 ‘1947 보스톤’ 스틸 컷.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영화 ‘1947 보스톤’ 스틸 컷.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팬데믹 기간 껑충 뛴 극장 관람료도 관객수 회복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의견도 있다. 실제로 지난 3월 빅데이터전문기업 TDI 조사를 보면 관객 열 명 중 여섯 명은 영화관 이용의 최대 단점으로 비싼 관람료를 꼽았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와 ‘스즈메의 문단속’ 덕분에 전체 극장 관객 수가 회복한 것처럼 보여도 이는 일부 마니아층의 N차 관람이 가져온 결과라는 분석도 있다. CJ CGV에 따르면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N차 관람비율은 티켓 수 기준 25.1%, ‘스즈메의 문단속’은 15.7%다. 부산에 사는 최병우(34) 씨는 “최근 ‘리바운드’를 재미있게 봐서 한 번 더 보고 싶은데 티켓 가격이 비싸 엄두를 못 내고 있다”고 했다.

박 위원장은 “극장 업계와 협의를 해서 요금 인하가 가능한지 논의하려고 한다”며 “악순환을 끊으려면 적절한 방안을 찾아 제시하면서 요금 인하를 유도해야 할 것 같다”고 했다.

한국 영화 침체가 길어져 산업 자체가 흔들리면, 지원이 필요한 독립예술 영화는 더 큰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익명을 요청한 한 독립영화인은 “예전에는 독립예술영화에 대한 논의가 조금씩이라도 있었는데 팬데믹을 거치면서 아예 없어졌다”며 “골든타임을 놓쳐 이대로 계속되면 답이 아예 없을 것”이라고 했다. ‘천만 영화’를 만든 익명을 요청한 한 감독도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결국 스타 캐스팅이나 제작 규모가 큰 영화만 살아남게 될 것”이라며 “다양한 독립예술영화 지원과 재능 있는 영화 신인들을 발굴하는 데 한계가 있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남유정 기자 honeybee@busan.com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