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달의 뒷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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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철 소설가

저녁 길을 걷다가 문뜩, 높다란 빌딩 사이의 보름달이 유난스러워 시선을 빼앗길 때가 있다. 밝은 달이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것 같아 새삼 멀뚱히 쳐다본다. 저 달이 원래는 없었는데, 내가 쳐다보니 나타났을지 모른다는 의심 때문이다. 가당찮은 의심은 갑자기 홱, 돌아보면 제자리를 찾아 허둥대는 달을 목격할지 모른다는 망상으로 번진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라는 놀이처럼 허겁지겁 자리를 옮기는 달에게 잡았다! 하며 소리쳐보고 싶기도 하다. 어린아이 같은 발상이긴 해도 나름 과학적 근거는 있다.

‘과학적’이라는 단어가 번듯하고 논리적이긴 하다. 하지만 과학은 의외로 혼란스러운 부분이 많다. 중력은 왜 서로 잡아당기는 건지. 전기가 흐르면 왜 전기장이라는 힘이 생기는지. 빛은 왜 직선으로 움직이고 속도가 일정한지를 지금도 이해하지 못한다.

학창 시절 수업 시간에 나 혼자만의 그런 질문에 빠져 정작 중요한 설명을 듣지 못할 때가 많았다. 덕분에 성적은 늘 겸손했다. 겸손해진 김에 그런 질문과도 잘 타협했다. 원래 그렇다는 것. 그게 바로 과학 법칙이고 우주의 법칙이라는 것.

그런데, 아무리 겸손하게 받아들이려 해도 아리송한 과학 분야가 있다. 바로 양자역학이다. 이 학문의 시작이자 기본으로 간주되는 ‘물질의 이중성’부터가 그렇다. 물질은 입자의 성질도 있고, 파동의 성질도 가졌다고 한다. 학교에서 배울 때는 시험에 나오는 항목이니 무작정 머릿속에 담았었다. 하지만 곰곰이 따져볼수록 점입가경으로 빠져드는 이론이다. 멀쩡히 눈앞에 보이고 만져지는 물질이 파동이 되기도 한다니. 이게 말이나 되나?

물론, 중요한 전제가 있다. 관찰자가 보고 인식할 때는 입자로 존재한다는 것. 평소에는 확률 파동으로 존재하던 것이, 관찰자, 즉 의식을 가지고 인식할 때는 온전한 물체로 수렴한다고 한다. 솔직히, 이해한다는 범주를 넘어서는 현상이다. 하지만, 물질의 기본을 다루는 양자역학에서는 이것을 기정사실로 여긴다.

근데, 여기에 정말 흥미로운 것이 있다. 바로 관찰자의 역할이다. 관찰자는 바로 ‘나’가 아닌가. 그러니까, 내가 쳐다봄으로 해서 저 달이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과학적 근거가 바로 이것이다. 달은 무조건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다. 무한대의 확률로 그 자리에 있을 뿐이며, 만약 내가 무한대의 횟수로 돌아본다면 한번쯤은 달이 없는 하늘을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모두가 보고 있는 달을 내가 못 봤다면, 그 순간 내 세상엔 달이 없다. 생각조차 하지 않는 ‘달’이 나에게 있을 리가 없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만의 세상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만약 내가 바삐 움직이고 있다면, 나의 세상은 시간도 다를 것이다. 물리학에서는 속도를 가진 것은 그 속도만큼의 다른 시간을 가진다고 했으니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서로 다른 세상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다른 순간에 서로를 관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관찰로 서로를 존재하게 하거나, 혹은 사라지게 만든다.

내가 얼마나 많은 이를 존재하게 하고 혹은 사라지게 했는지 생각해보지 않을 수가 없다. 가족과 직장, 우연히 쳐다봄으로 해서 존재하게 된 배달 오토바이, 혹은 떠들썩한 뉴스로 인식하게 된 스포츠 팀이나 연예인이 내 세상의 전부일까?

부인하고 싶지만, 쳐다보지도 않고 관심도 없어 잃어버린 세상이 훨씬 많다. 하지만 좁디좁은 나의 세상에서도 소외된 달의 뒷면만큼은 기억해야 할 것 같다. 만약 내가 휘영청 뜬 달을 쳐다봤다면, 그 달의 뒷면은 분명히 있을 테니까. 초승달이든 보름달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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