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 추적, 왜?] 비자 서류 준비만 두 달 이상… “지원금까지 주는 대만 갈 걸”

이승훈 기자 lee88@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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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추적, 왜?] 외국인 창업 막는 비자제도

사업 모델 검증 유럽과 달리
사업자별 신원 증명에 초점
필수 교육 오프라인만 가능
기관마다 요구 서류도 제각각
학위 요구 등 시대 흐름 안 맞아
부산 기술창업 체류 2명 그쳐
지역특화 비자 등 유연 적용을

다음 달 초 부산 해운대구 송정동에 ‘너티 뮤즈 스튜디오’를 여는 안나 본다렌코(가운데) 씨가 지난 16일 스튜디오 방문객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본다렌코 씨는 거주 비자를 가진 배우자가 있어 그나마 기술창업비자를 받는 동안 체류 기간에 대한 부담이 없었다. 김종진 기자 kjj1761@ 다음 달 초 부산 해운대구 송정동에 ‘너티 뮤즈 스튜디오’를 여는 안나 본다렌코(가운데) 씨가 지난 16일 스튜디오 방문객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본다렌코 씨는 거주 비자를 가진 배우자가 있어 그나마 기술창업비자를 받는 동안 체류 기간에 대한 부담이 없었다. 김종진 기자 kjj1761@

“이럴 줄 알았으면 대만으로 갔을 겁니다.”

벨기에 출신 예비 창업자 A 씨. 그는 부산에서 기술 플랫폼을 통한 지역기업 컨설팅 업체 설립을 준비 중이다. 그러나 그에게 부산에서의 시간은 수개월째 멈춰 있다. 올 초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접고 스타트업이라는 큰 꿈을 품고 부산으로 왔지만, 복잡한 ‘비자 문제’가 발목을 잡았던 것이다.

서류 준비에만 두 달 이상이 걸렸다. 체류기간이 만료되는 오는 10월까지 법인 설립과 특허 출원 등도 이뤄내야 한다. 창업 아이템을 제대로 설명할 기회조차 얻지 못해 답답하기만 하다. 더구나 돈을 버는 다른 일을 할 수도 없어 매달 월세를 포함해 100만~150만 원을 쓴다. 서울 직장에서 받은 퇴직금으로 겨우 버티고 있다.

A 씨는 “대만은 외국인에게 창업 지원금 혜택도 준다고 들었다”며 “지금은 지인들에게 한국과 개인적으로 관계가 없다면 싱가포르, 일본, 대만에서 창업하라고 추천한다”고 말했다.


■발목 잡는 학위 등 ‘형식적 조건’

A 씨를 포함한 외국인 예비 창업자들은 현 비자 제도가 ‘구시대적’이라고 입을 모은다. 사업 모델을 검증하고 좋은 아이템을 선별하는 형식이 아니라 사업자 개개인을 증명하는 데 집중한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게 ‘학위’다. 실제 기술창업비자(D-8-4)를 받으려면 국내 전문학사 이상(외국 학사 이상) 학위를 받거나 중앙행정기관장의 추천을 받아야 한다. 아이디어 하나로 유니콘 기업(거대 신생기업)이 되는 시대 흐름과 맞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현재 유럽은 개인 자격보다 사업 모델의 혁신성, 창업동기, 연구실적 등을 토대로 비자를 발급해준다. 네덜란드는 외국인을 위한 별도 스타트업 비자를 운영 중이고, ‘사후 평가’로 자영업 비자를 주기도 한다.

외국인 예비 창업자가 외국에서 취득한 학위 증명서류를 국내에 들여오는 데에도 적잖은 시간이 걸린다. 미국에서 석사 학위를 받은 예비 창업자 B 씨는 비자 신청 과정에서 두 번이나 미국에 다녀왔다. B 씨는 “한국의 비자 관련 부처가 학위 증명서를 뗀 뒤 현지 시·구청에서 인증을 받아 오라고 하더라”며 “미국은 서류 처리가 한국처럼 빠르지 않아 직접 찾아가 재촉해야 했다”고 말했다.

더불어 80점 이상을 받아야 하는 창업이민종합지원시스템의 경우 교육 과정이 너무 많고 오프라인으로 수료해야 해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민원이 이어진다. 체류 기간이 있어 ‘시간’에 매우 예민할 수밖에 없다.


■지역 활기 처방전 ‘비자 유연성’

불건전한 사업이나 능력 없는 외국인 창업자를 걸러내기 위해 까다로운 비자 요건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극도로 저조한 창업률과 일자리 창출 효과 등을 고려할 때 가장 큰 원인으로 지목된 비자 걸림돌을 들여다봐야 할 상황이다.

현재 수도권을 제외한 지역 대도시에는 기술창업비자를 받아 체류하는 외국인이 거의 없다. 지난 3월 말 기준으로 부산 2명, 대구 5명 정도다. 비자 문턱이 산업이 부족한 지역에 더 큰 타격을 주고 있는 셈이다.

이에 따라 올해 시범사업이 진행되는 ‘지역특화형 비자’ 등의 활용 폭을 넓혀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역특화형 비자는 지자체 차원에서 지역의 우수한 스타트업 기업인을 추천할 수 있는 제도다.

부산의 경우 지역특화형 비자에 창업을 배제하는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 비난을 사고 있다. 외국인 창업 활성화 관련 토론회를 준비 중인 부산시의회 서지연 의원은 “부산이 외자 펀드, 투자 유치 등은 강조하면서도 정작 외국인에게 창업 환경을 만들어 주지 않는 것은 모순”이라고 말했다

성공적인 외국인 창업은 많은 일자리를 만들어 내는 등 인구 감소 위기 지역에 새로운 활력이 될 수 있다. 러시아 출신 안나 본다렌코 씨의 경우 배우자 비자(f3)가 있어 상대적으로 수월하게 창업에 골인할 수 있었다. 그는 다음 달 초 해운대구 송정동에 유럽형 오픈 스튜디오인 ‘너티 뮤즈 스튜디오’를 연다. 대당 수백만 원에 달하는 스크린 프린트 장비와 고급형 이젤 등을 갖춰 누구나 미술을 배우거나 즐길 수 있다. 특히 어린이가 영어와 미술을 동시에 접할 수 있어 이제 겨우 개장을 준비 중인데도 관련 SNS 문의가 끊이지 않는다. 본다렌코 씨는 곧 한국인 직원도 채용할 계획이다.

그는 “기술창업비자를 받는 데 거의 6개월 정도 걸렸다. 배우자 비자가 있어 시간이 걸림돌이 되지는 않았다”며 “유학생 등은 큰 돈도 없는 데다 체류 기간도 짧아 창업이 쉽지 않은 게 현실”이라고 실정을 전했다.

(사)이주민과함께 정지숙 상임이사는 “외국인 창업은 이들이 지역에 거주하며 활력을 주는 경제활동을 한다는 것”이라며 “기본적으로 포용 정책을 펴고 이후 불필요한 부분을 제거해 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승훈 기자 lee88@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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