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훈의 생각의 빛] 논쟁의 씨앗이 떨어진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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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가

근래 SNS상 ‘언어 타락-문단 권력’ 논쟁
양편 갈라서서 서로를 무찌르는 데 혈안
섣부른 억측 접고 순수한 마음 헤아려야

며칠 전 아침에 깨어나 보니 새벽 1시 30분경 어느 시인으로부터 전화가 와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주말 오전이었지만 그의 직업 특성상 출근하는 날임을 알고 있었기에 출근 시간에 맞춰 한 번, 그로부터 한 시간여 뒤에 한 번 더 통화를 시도했지만 전화를 받지 않았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필시 용건이 있었기에 ‘불편한 시각’이었는데도 그즈음 휴대폰을 열어 통화를 시도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상대방으로부터 걸려 온 전화를 받지 않았다. 아마 실수로 통화 버튼을 눌렀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경우를 우리는 종종 경험한다. 전화벨 소리는 상대방이 일방적으로 신호를 보내는 소리다. 휴대폰을 사이에 두고 통화를 하는 일은 커뮤니케이션의 일종이다. 나 자신이 누구에게 할 말이 있을 때 전화를 거는 행위 또한 일방적인 신호다. 여기서 ‘일방’과 ‘언어적 교감’은 미묘하게 갈라진다. 언어적 교감을 위해서는 어느 편이든지 먼저 일방적인 신호를 보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졌을 때 먼저 행한 일방적인 신호는 ‘정다운 눈짓’으로 탈바꿈한다. 하지만 상대방과 언쟁을 높이게 되거나 어떤 사정으로 사이가 틀어지는 계기가 되었을 때는, 일방적인 신호는 ‘적의(敵意)를 실은 탄두’였다고 오인(誤認)하게 된다.


생각으로 시작해서 생각으로 끝나야지, 그 생각이 궁리를 거듭해 사실관계 자체를 잘못 해석하거나 오해를 거쳐 굳건한 판단에 닿게 되면 문제가 발생한다. 최근 SNS를 달구었던 시인과 독자 사이의 논쟁, 그리고 여기에 수많은 의견이 달라붙어 ‘확전’의 양상마저 띠었던 ‘언어 타락-권력 논쟁’을 복기해 본다. ‘유명 시인’과 ‘유명 독자’ 사이에서 촉발된 민감한 글들이 SNS 곳곳에 퍼지면서 그 논쟁은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왔다. 어떤 식으로든 양자가 논쟁을 거듭하지 않기로 ‘합의’를 보고 ‘평온’해진 상황에서 그 일을 거론하는 게 내키지는 않지만, 문득 ‘생각’과 ‘판단’ 사이의 간격이 얼마나 깊고도 먼지 말을 하고 싶다.

상대에 대한 생각이 궁리를 불러오고 막연하나마 판단을 내리게 되면 상대방의 진면목을 더 이상 볼 수가 없다. 스스로 상대방을 결정해 버렸기 때문이다. 이럴 때 주고받는 커뮤니케이션에는 무수한 오해와 편견이 활자 밑에 깔려 있다. ‘유명 독자’가 펼쳤던 명쾌한 논리와 문학 현실의 맥을 잘 짚었던 시각적 예민함은, ‘유명 시인’의 자기 확신과 엘리트주의적인 논법을 뚫고 지나갈 수 없었다. 그 둘 사이에 가로막혀 있는 것은 사실 두 사람이 합작해서 간신히 쌓아놓은 장벽이 아니라, 두 사람이 보여준 논쟁과 화법에 달라붙어 편을 갈라 서로를 ‘무찌르기’에 바빴던 군중들이었다.

사람 마음만큼 간교한 것도 없다. 흔한 말로 뒷간 들어갈 때와 나올 때 마음이 다르다는 표현을 떠올리면 될 것이다. 이 점은 사람만큼 허약하고 부러지기 쉬운 내면을 가진 존재도 없다는 말과도 같다. 사태가 이럴진대 우리는 저마다 숱한 맹세와 약속과 믿음을 드러낸다. 그 맹세와 약속과 믿음이 한순간 물거품이 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렇게 한다. ‘언어 타락-권력 논쟁’을 주도했던 두 사람은 지금쯤 그 논쟁을 상기하며 어떤 생각을 할까. 모르긴 해도 아마 논쟁을 펼치면서 비판했던 논리와 판단이 더 굳건해지지 않았을까. 그러나 소득도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두 사람으로 촉발된 논쟁적인 담론을 수많은 사람이 생각하고 반추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일 것이다.

정치나 종교 논쟁만큼 해답 없는 논쟁도 없다. 여기에 문학도 끼워 넣고 싶다. 요새 한동안 뜸해서 그 옛날의 ‘문학 논쟁’이 그리웠던 사람들은 앞서 말한 논쟁을 지켜보며 논쟁의 진위와 상황과는 관계없이 흐뭇함을 느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만큼 문단에서 ‘논쟁’은 일종의 금기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이는 문단사가 말해 준다. 논쟁의 끝은 자멸이거나, 절필이거나, 희생양이나 따돌림의 대상이 되거나, 문학 자체에 대한 환멸이었다. 자신의 주장을 둘러싼 세간의 공격을 이겨낼 용기가 없는 작가는 함부로 자신의 주장이나 의견을 지면에 발표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그간 문학 논쟁을 치르며 눈물, 콧물, 핏물 따위를 흘려왔던 숱한 작가들의 암묵적인 결론이었다.

그런 ‘비극적인’ 문단이 각자 다양한 방식과 형식대로 ‘자족적이면서 안온한’ 문화를 ‘꽃피울 때’조차 논쟁의 씨앗은 여기저기 흩뿌려져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 씨앗을 줍는 자는 결코 씨앗이 떨어진 자리를 잊지 않는 법이다. 판단과 억측을 허용하지 않는 날것 그대로의 씨앗을 최초로 발견한 자만이 논쟁의 최후를 그릴 수 있다. 그 나머지들은 바람 부는 대로 흩날리는 쭉정이들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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