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희와 함께 읽는 우리 시대 문화풍경] 폐허에 꽃핀 전시 음악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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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대 대학원 예술·문화와 영상매체협동과정 강사

‘민주중보’(1949년 2월 24일 자)에 수록한 부산음악전문학교 학생모집 광고. ‘민주중보’(1949년 2월 24일 자)에 수록한 부산음악전문학교 학생모집 광고.

한국전쟁기 전시연합대학이 설치되었다. 서울대 역사학과 교수 김성칠의 일기에 따르면, 1950년 12월 1일 세 번째 강의를 했다고 한다. 1·4후퇴 이후 피란수도 부산에서 전시연합대학을 새로 꾸렸다. 1951년 2월 18일 합동 개강식을 개최하고 3월 29일부터 강의를 시작했다. 문교부와 국제연합한국재건단(UNKRA)의 지원으로 부민관, 해동중학교, 변재성법률사무소 등지에서 수업을 재개했다. 1951년 5월 4일 ‘대학교육에 관한 전시특별조치령’이 시행되었으니, 수업 개시 이후에야 제도화되었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천막학교를 오가면서도 교육의 열망만큼은 총구보다도 뜨거웠던 셈이다.

전시 음악교육은 어떠했을까. 서울대, 이화여대, 숙명여대에서 교육을 이어갔다. 특히 용두산공원에 자리한 이화여대 천막강당에서는 음악회, 문학의 밤, 웅변대회 등 다양한 문화행사가 열렸다. 윤용하와 이상근도 이곳에서 작곡발표회를 개최했다. 부산과 진해에서 육군과 해군이 운영한 군악학교도 빼놓을 수 없다. 해군군악학교는 대학 4년 과정을 보통과 2년 고등과 6개월의 교육과정으로 편성하여 교사 자격을 얻을 수 있도록 국방부 및 문교부와 교섭했다고 한다. 작곡가 김정길은 해군군악학교가 고등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했다고 회고했다.

이와 달리 해방기 부산지역 고등음악교육의 전통이 단절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부산사범학교와 부산음악전문학교가 대표적이다. 단정수립 이후 초등교원 양성기관인 부산사범학교에서는 이례적으로 중등음악교사를 배출했는데 전시 상황에서 중단되고 말았다. 1948년 바이올리니스트 김학성이 설립한 부산음악전문학교의 운명도 다르지 않았다. 성악과, 바이올린과, 피아노과, 작곡과를 두었으며, 윤이상과 배도순, 김점덕, 김호민 등이 교수진으로 참여했다. 소설가 김석호와 김정한, 남상협, 문홍주, 백대진 등 문인, 연극인, 언론인, 인문학자들이 교양교육을 맡았다. 음악적 기량뿐만 아니라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음악가를 양성하고자 했다. 오늘날 음악대학의 커리큘럼도 비교해도 크게 뒤지지 않는 교육과정을 운영했으나, 전쟁의 포연 속에서 스러지고 말았다.

이즈음 한국전쟁의 와중에도 쉽게 멈추지 않았던 고등음악교육이 위기를 맞고 있다. 지역의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예술을 전공하겠다는 이는 점점 줄어들고 경제논리에 편승해 폐과를 서슴지 않는다. 신라대 음악학과에 이어 동아대 클래식작곡 전공의 폐지가 단적인 예다. 음악학자 이유선은 제도권 내에서 음악교육의 부실한 운영을 비판하면서 연령이나 학력에 관계없이 음악을 전공할 수 있는 단과음악대학의 필요성을 역설하기도 했다. 일종의 콘서바토리(Conservatory)다. 한국전쟁 이후 거의 단절되다시피 했던 음악전문학교의 전통을 부산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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