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문학 자양분은 윤동주·고석규·김윤식 세 분”

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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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생 비평가와의 대화
두 번째로 남송우 평론가 조명

1980년대 지역문학 운동 첫발
‘실천’ 나아간 건 신앙에 뿌리 둬
‘대화’ 통해 지역문화 돋을새김

‘1950년대생 비평가 연구포럼-제2회 비평가와의 대화’에 나선 남송우 평론가는 “윤동주 고석규 김윤식 세 분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고 했다. 최학림 선임기자 theos@ ‘1950년대생 비평가 연구포럼-제2회 비평가와의 대화’에 나선 남송우 평론가는 “윤동주 고석규 김윤식 세 분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고 했다. 최학림 선임기자 theos@

지난달 30일 ‘문화공간 봄’에서 <오늘의문예비평>이 주최·주관한 ‘1950년대생 비평가 연구포럼-제2회 비평가와의 대화’에 1952년생 남송우(고신대 석좌교수) 평론가가 나섰다.

그의 사람됨과 비평의 밑자리에 ‘신앙’과 ‘믿음’이 있었다. ‘라치오(ratio, 이성)’와 ‘피데스(fides, 믿음)’를 인간의 두 축이라 할 때 믿음·신념은 실천(praxis)으로 내달리는바, 비평을 확장한 그의 문화운동적 실천은 ‘종교적 태도’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었다. 일찍이 그는 1976년 <부대신문>에 쓴 ‘문학과 종교’에서 “문학은 세상이 이러이러하다고 묘사하고 암시할 뿐이다. 반대로 종교는 이러해야 한다며 명쾌한 해결을 주고 구원을 당면 목표로 삼지 않으면 안 된다”며 종교를 실천과 연관시켰다. ‘종교는 문제 해결 및 실행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 그의 뿌리 생각이다.

이날 그는 “부산대 국문과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동시에 신학 공부를 위해 고려신학대학원에 입학했다”며 “아마도 신학대학원에 계속 다녔더라면 나는 지금 목사가 돼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당시 그는 신학대학원 1학기를 마치고 뜻밖에 척추를 다치는 큰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친구가 ‘휴학계 제출 부탁’을 그만 깜박해 결국 그는 신학대학원에서 제적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남송우 평론가는 “윤동주가 노래한 시처럼 살고자 했다”고 말했다. 부산일보DB 남송우 평론가는 “윤동주가 노래한 시처럼 살고자 했다”고 말했다. 부산일보DB

그는 자신의 문학 인생에 큰 영향을 준 세 명-윤동주 고석규 김윤식을 꼽았다. 그들은 그에게 ‘종교적 면모’를 일깨우리만치 도저한 글쓰기로 단계를 뛰어넘은 삶을 살았던 문학인이다. 남송우는 “대학 시절 학생신앙운동(SFC)에 깊이 빠졌는데 맨 처음 윤동주를 ‘가슴에 전해지는 지독한 순정’으로 만났다”고 했다. ‘어떻게 이렇게 순수하게 삶을 노래하고 살아갔을까’라는 충격을 준 윤동주는 장차 실천으로 나아가는 그의 비평적 원점이라는 것이다. 졸업논문, 1980년 조선일보 신춘 가작, 1981년 중앙일보 신춘 등단작까지 윤동주론이었다. ‘평범하지만 성실한 글쓰기’라는 등단작 심사평이 인상적이다.

26세로 요절하기 전 짧은 기간 동안 뭇사람의 평생 글쓰기 이상을 쏟아낸 고석규, 그 고석규를 온전히 불러냈을 뿐 아니라 역시 평생을 글쓰기로 불태운 김윤식은 문학 속에서 ‘신념’과 ‘실천’을 일치시킨 존재로서, 윤동주와 다르지 않게 그의 비평적 글쓰기와 삶을 추동했다는 것이다. 그는 “고석규 복원은 김윤식 선생의 공”이라며 “고석규를 통해 김윤식 선생을 만났던 것”이라고 했다.

남송우 비평에서 그의 독특한 뉘앙스가 담긴 ‘실천’을 빼놓을 수 없는데 이날 ‘지역문화운동에서 해양문학론으로’를 발제한 문학평론가 박동억은 “남송우의 초기 비평은 무크지 운동과 지역문화운동으로 요약된다”고 했다. 1980년대 시대 상황 속에서 그의 비평은 초기부터 ‘운동’과 관련됐다는 것인데 그 연장선에서 1991년 창간한 <오늘의문예비평>은 그가 여전히 발행인을 맡고 있는, 부산을 ‘비평의 나라’로 명명케 한 비평전문지다.

지난달 30일 ‘문화공간 봄’에서 열린 ‘1950년대생 비평가 연구포럼-제2회 비평가와의 대화’. <오늘의문예비평> 제공 지난달 30일 ‘문화공간 봄’에서 열린 ‘1950년대생 비평가 연구포럼-제2회 비평가와의 대화’. <오늘의문예비평> 제공

그는 비평을 확장시켜 아예 문화운동으로 나아가 있는데 그 이유는 “지역문화분권를 이뤄야 한다는 절박하고 애타는 심정과 그 과제가 나를 온통, 가장 크게 사로잡아왔다”는 말에 잘 표현돼 있다. “온전한 지역시대의 실현은 정치적 분권보다는 오히려 문화적 분권을 통해 가능하다”는 것이다. 부산문화재단 대표를 역임한 것을 비롯해 이순신학교, 경부울문화연대, 부산국제영화제, 해양문학/문화, 고석규비평문학관, 이주홍문학재단, 부산인문연대, 영광독서토론회, 인본사회연구소 등등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거론할 수 없을 정도로 그는 지역문화 장에서 널따랗게 활약 중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신앙생활을 해온 저는 사실상 더 이상 개인적인 욕심은 없다”며 “기도 중에 하나님이 너는 세상에서 무엇을 했느냐 물으실 때 제 답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를 항상 새길 뿐이다”고 했다. 한국전쟁의 깊은 상흔을 치유하게 된 부친을 따라 어릴 때 그의 집안은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문화운동 장에서, 날카로운 비판도 빼놓지 않지만 무엇보다 그가 가장 중시하는 것은 ‘대화’다. ‘대화’는 그의 비평과 문화운동을 꿰는 핵심어다. 그 맥락에서 박동억은 “다양한 이해와 해석을 통해 전체와 총체성을 확보해나간다는 ‘해석학적 대화’가 그의 비평적 관점”이라고 했다. 그 비평적 관점은 그의 인간적 관점이기도 하다. 그는 대화를 통해 다양한 의견을 절충하면서 <오문비>를 30년 이상 끌어 왔고, 부산문학사에서 요산과 함께 향파를 양대 축으로 조명해 왔다고도 할 수 있다. “윤동주가 노래한 시처럼 살고자 했다”는 그는 ‘성숙한 토론’과 ‘지성적 대화’를 지향하면서 ‘지역문화’를 돋을새김해온 것이다.


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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