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방·경합·공생으로 꿈틀거린 동아시아 바다 역사

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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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서 본 역사/하네다 마사시

동아시아 700년 문명교류 역사 고찰
당나라 때 신라인·무슬림 활동 활발
16세기 밀무역자 왕직 손잡은 왜구
명, 일본 교역 배제…임란 주요 요인

바다는 역사가 꿈틀거리는 교역의 장이다. 부산항에서 어선이 출항하는 모습. 부산일보DB 바다는 역사가 꿈틀거리는 교역의 장이다. 부산항에서 어선이 출항하는 모습. 부산일보DB
임진왜란은 16세기 동아시아 무역 시스템의 변동과 토요토미의 야욕이 맞물려 빚어진 당대 세계대전이었다. 사진은 임진난 당시 동래성 전투를 재현한 동래읍성 역사축제 모습. 부산일보DB 임진왜란은 16세기 동아시아 무역 시스템의 변동과 토요토미의 야욕이 맞물려 빚어진 당대 세계대전이었다. 사진은 임진난 당시 동래성 전투를 재현한 동래읍성 역사축제 모습. 부산일보DB

<바다에서 본 역사>는 동아시아 700년 문명 교류사를 살핀 책이다. ‘1250~1350년 열려 있는 바다’ ‘1500~1600년 경합하는 바다’ ‘1700~1800년 공생하는 바다’라는 3부 로 이뤄져 있다. 그 구성 속에서 700년 역사, 아니 그 이상의 역사를 아우른다. 경계 없이 꿈틀거리는 바다처럼 동아시아 역사가 꿈틀거린다.

7~9세기 당나라 때 바다를 처음에 장악한 이들은 신라 상인과 무슬림 해상(海商)이었다. 무슬림은 저장성 닝보에 페르시아인 거주지인 ‘파사단’을 형성했고, 신라 상인은 산둥반도 일대에 신라방을 설치했다. 신라인 활약의 정점은 장보고로 이어진다. 장보고는 동아시아 바다를 처음으로 연결한 세계사적 인물이었다.

9세기부터 동아시아 해역에 급속 확산한 화인(華人, 중국인) 해상은 동중국해에서 신라인을 대신했고, 남중국해에서는 무슬림 해상과 갈등을 겪게 된다. 그 갈등을 조정하기 위해 당나라 때부터 세관인 ‘시박사(市舶司)’를 설치하는데 이것이 중국 해상무역관리기구의 출발이었다. 송나라 때는 상업혁명이 일어났다고 할 정도로 특히 중국 강남을 중심으로 활발한 바다 교역이 성행했다. 시박사가 북송 때 5곳, 남송 때 무려 10곳에 설치되는데 1곳만 제외한 채 모두 양쯔강 이남에 있었다. 교류의 바다가 활짝 열렸으며 그 기세는 원나라까지 이어졌다. 송·원 시대의 ‘열린 바다’ 면모가 1250~1350년을 다룬 1부에 응축돼 있다.

그런데 14세기 중반 이후에 등장한 명나라(1368~1644)는 희한하게도 바다 문을 닫는 ‘해금(海禁)정책’를 표방한다. 한족 홍무제 주원장이 그런 사람이었다. 명나라 체제는 ‘국제성을 표방한 당나라 체제’와는 정반대로 내달렸다. 그러나 오래 갈 수 없었다.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 등 유럽 상인이 동아시아 바다에 뛰어들었다. 1510년 포르투갈의 말라카 점령, 1571년 에스파냐의 마닐라 점령, 1619년 네덜란드의 바타비아(자카르타) 점령 등은 상징적 사건이다. 동아시아 ‘해역 자체 힘’도 최고조로 발전한다. 요컨대 역사 팽창은 막을 수 없는 것이다.

그로 인해 동아시아 무역 시스템이 재편되면서 ‘1570년 시스템’이 탄생한다. 명나라의 해금 체제가 깨졌다는 것이다. 포르투갈은 인도 고아-믈라카-마카오-나가사키를 있는 무역을 전개하고, 스페인은 마닐라를 거점으로 아메리카와 아시아를 잇는 태평양 무역을 전개한다. 이 당시 교역의 핵심은 은(銀)이었다. 세계적이라는 일본 이와미 광산의 은과, 태평양과 유럽을 거쳐온 아메리카 은이 중국으로 흘러들어갔다. 중국은 은을 먹는 하마, 은의 블랙홀이었다. 연간 100~150톤 은이 중국으로 흘러들어갔다.

이런 교역 붐 속에서 상인의 돈 힘과 군사력이 결합하고, 아시아에 3개 신흥세력이 대두한다. 일본 토요토미 정권, 중국 동북 변경의 누르하치-홍타이지 부자, 중국 동남 연안의 정지룡-정성공 부자다. 17세기 정지룡-정성공 부자는 푸젠성 취안저우를 근거지 삼은 반청세력으로 일본과 연결돼 있었다. 정지룡이 피난한 일본 히라도(平戸)에서 아들 정성공을 낳았던 것이다. 반청운동의 새 근거지로 대만에 들어가면서 네덜란드를 쫓아낸 정성공은 대만의 영웅으로 섬겨진다. 동북변경의 누르하치 부자는 청나라를 건국해 결국 중국 대륙을 삼킨다.

16세기 후기 왜구 시절, 이름 높은 밀무역자가 왕직이다. 그는 저장성 닝보 쌍서항을 밀무역 근거지로 삼아 동아시아를 종횡했다. 명나라는 1548년 쌍서항을 진압하고 대신 1567년 푸젠성 장저우에 월항을 개항한다. 이때 명은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 등에게는 교역을 허용했으나 일본은 배제했다. 왕직 등과 어울린 일본 왜구들이 ‘남왜’로 중국 연안을 들쑤셔놨기 때문이다. 교역에서 배제 당한 일본은 흑심을 키우게 된다. 은의 유통으로 한창 재미를 보던 일본이었다. 그래서 명나라를 공격하겠다는 빌미로 조선을 침략한 것이 임진왜란이다. 물론 왜란에는 공상가 토요토미의 야심이 큰 몫을 했으나 동아시아 교역 체제 속에서의 일본 배제도 중요 요인으로 꼽힌다는 것이다.

동아시아 바다 역사에서 후기 왜구의 거두 왕직, 새로운 해상 세력 정성공, 그들은 16~17세기 아시아 바다를 호령한 이들이다. 그러나 그들도 9세기 동아시아 바다를 교역으로 연결한 장보고에 비한다면 작은 존재에 불과할 것이다. 그만큼 장보고는 최초로 우뚝하다. 한편 이 책은 2019년 출간됐으나 바다 역사에 대한 관심 고조 흐름에 맞춰 소개한다. ‘일본 중심 시각’을 잘 걸러내야 한다. 하네다 마사시 엮음/조영헌 정순일 옮김/민음사/403쪽/2만 원.

<바다에서 본 역사>. 민음사 제공 <바다에서 본 역사>. 민음사 제공


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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