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죄와 용서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서정아 소설가

가톨릭 신자인 나는 최소 일 년에 두 번은 신부님 앞에서 고해성사를 해야 한다. 죄를 뉘우치고 같은 잘못을 다시 반복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해도 부족한 인격 탓에 결국 또 유사한 죄들을 저지르고 만다. 때문에 매번 비슷비슷한 죄의 항목들을 고해하게 되는데, 그중에서도 내가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한 채 미움을 품고 있다는 사실은 고해성사를 하고 나서도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숙제처럼 남아서 나를 무척이나 괴롭게 한다. 마음속의 의문을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상대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내게 진심으로 사과하지 않는데 어떻게 용서가 되나. 누군가에게 상처를 준 사람은 이미 스스로를 용서하고(혹은 잘못이라고 여기지도 않고) 그 죄로부터 벌써 해방되었는데, 왜 상처를 받은 사람은 오랜 시간 아픔을 홀로 견디면서도 도리어 용서하지 못했음을 괴로워해야 하는가. 그런 의문 때문에 나의 고해성사는 시작도 끝도 괴로움투성이다. 한 사람에 대한 미움을, 3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풀어내지 못하고 있으므로 나의 해묵은 죄는 여전히 반복되는 것이다.

기억력이 나쁜 편이지만 그날 그녀가 입고 있던 청바지의 밝고 환한 색감은 또렷하게 기억이 난다. 울면서도 눈을 똑바로 뜨고 그 청바지를 붙들었기 때문이다. 놓치면 죽기라도 할 것처럼, 목숨줄이라도 되는 양 최선을 다해서. 그러나 고작 열 살짜리 어린애의 최선이었다. 이미 결심을 끝낸 어른의 차갑고 완고한 힘을 이겨낼 도리는 없었다. 이제 나는 그 시절 그녀의 나이를 훨씬 넘어서버렸지만, 그래서 그때의 그녀를 어른의 마음으로 이해해볼 수도 있겠지만, 죽을힘을 다해 붙들었던 바짓자락을 끝내 놓치고 만 그 순간을 떠올리면 어쩔 수 없이 열 살짜리 여자아이로 되돌아가 울어버리게 된다. 그녀는 왜 내가 잘 때 몰래 떠나지 않고, 햇빛이 반짝거리는 한낮에 그토록 환한 옷을 입고 내 손을 뿌리치며 갔을까. 그것은 자신의 삶에 대한 결연한 의지였을까, 그저 타인을 고려하지 않는 천진한 난폭이었을까. 나는 그게 무엇이었는지 여전히 알 수가 없고, 그녀는 아직도 내게 그날의 일을 사과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미움으로 가득 찬 마음에 대해 여러 번 고해를 하면서도, 맺힌 것을 여전히 풀 수가 없다.

그러나 나의 죄라는 것이 다만 타인을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 그것뿐이겠는가. 내가 그 반대편에 서 있었을 수도 있다. 나의 무심함과 자기중심성과 안이한 타협과 가벼운 언행들이 누군가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거나 세상을 나쁘게 만드는 데 기여했을지도 모른다. 명백히 잘못했는데 스스로는 여전히 죄인 줄도 모르며, 구체적으로 뉘우치지 못하고 있는 일들. 그런 일들이 분명히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다 보면 내가 아는 죄만 고백하고 그것을 용서받는 일이 과연 타당한 일인지 의구심이 든다. 물론 고해성사의 마지막에는 이런 구절을 읊게 되어 있다. “이밖에 알아내지 못한 죄에 대하여도 통회하오니 사하여 주소서.” 하지만 알아내지 못한 죄를 용서받아도 되는 걸까. 알아내지 못했다는 것이야말로, 그 무지의 죄악이야말로 진정 용서받을 수 없는 것 아닌가. 그런 의문은 여전히 나를 놓아주지 않으므로 나는 고해소를 나와서도 마음이 편치가 않다.

나이가 들수록 마음이 너그러워질 줄 알았는데 미움도 분노도 용서할 수 없는 일들도 자꾸 늘어만 간다. 우리의 불안과 고통을 그저 괴담이라고 퉁치며 한가한 먹방 이벤트를 여는 이들에게도 분노만 쌓이고 도무지 용서할 마음이 들지 않으니 나의 죄는 이렇게 또 축적되는 것인가.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 그래서 누군가를 상처 입히고 세상을 나쁘게 만드는 데 천진하게 기여하는 사람, 끝내 뉘우치지 않고 사과하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들마저도 신은 용서할까. 나는 아무래도 그러지 못할 것 같다.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