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진의 여행 너머] 선과 섬

이대진 기자 djrhe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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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라이프부 차장

충청남도와 전라북도의 경계 어디쯤이었던 것 같다. 두 바퀴로 국도를 달리던 중 마주한 풍경에 한동안 시선이 빼앗겼다. 아늑한 산세와 기분 좋은 바람, 다채로운 녹음. 서울에서 출발해 며칠째 계속된 자전거 여행의 여독이 일순간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20년 전 기억은 지금까지 강렬하게 남아 있다. 자동차로 빠르게 지나쳤다면 평생 몰랐을 장면이다.

얼마 전 경남 진주시를 여행하며 비슷한 경험을 했다. ‘탄소제로’에 도전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버스터미널에 내린 뒤부터 두 발과 두 바퀴에만 의지했다. 걸어서 진주성과 촉석루, 주변 시내를 둘러본 뒤 무료 자전거를 빌려 남강 변을 달렸다. 강 건너에서 바라본 진주성과 촉석루의 위용. 물결만큼이나 잔잔한 물 내음. 기사로 다 표현해 내지는 못했지만 진주 하면 떠오르는 그림으로 저장돼 있다.

대개 성인이 되어 운전대를 잡기 시작하면 여행 방식이 단조로워진다. 소위 명소로 불리는 지점을 찍고 다음 지점으로 이동하는 식이다. 점과 점 사이, 선에서 만날 수 있는 매력을 지나치기 일쑤다. 선상에서 자연을 만나고 사람을 사귀며, 문화를 느끼고 삶을 배운다. 해외여행에서 많은 이들이 골목길을 걷는 이유다.

최근 서울에서 부러운 선들을 만났다. 청와대 탐방 중 경복궁 주변 서촌·북촌·삼청동 지도를 펼쳤을 때다. 작은 박물관과 갤러리, 위인들 생가와 집터, 문화유산과 카페·공방 등 수많은 점들이 거미줄처럼 이어진 크고 작은 길과 만났다. 무궁무진한 볼거리에 동선을 어떻게 정할지 행복한 고민에 빠진다. 한나절, 아니 몇 날 며칠 머물러도 좋을 매력들이 곳곳에 살아 숨쉰다.

구석구석 선의 여행이 가능한 건 알알이 구슬을 잘 꿴 덕분이다. 부산은 어떤가. 각 지자체마다 관광지를 표방하며 홍보에 열을 올리지만 점들의 엮임은 헐겁다. 명소와 명소 사이는 멀고 섬처럼 동떨어져 두 발, 두 바퀴로 여행하기 어렵다. 구슬의 가치를 스스로 내버리기도 한다. 적산가옥을 비롯한 근대건축물, 피란수도의 흔적 등 서울과는 차별화한 근대문화유산을 지녔지만, 개발 논리에 밀려 시나브로 사라진 경우가 부지기수다. 도처에 널린 100년 넘은 옛길도 스토리텔링을 입히지 못한 채 방치되고 있다. 중·동·서·영도구, 부산의 원도심 지역에 산재한 근대문화유산을 잘 보존하고 탄탄한 선으로 엮어 냈다면 해운대·광안리와는 또 다른 매력으로 거듭나지 않았을까.

‘섬’을 선으로 만드는 시작은 가진 자산을 제대로 파악하고 가치를 재발견하는 것이다. 부산은 세계 도시와 견줘 어떤 매력을 지녔나. 잘 모르겠다면 이방인의 시선으로 되물어도 좋다. 진주 남강의 물 내음, 서울 한옥마을의 다채로운 골목처럼 말이다.


이대진 기자 djrhe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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