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금성은 한국 해양소설의 무대를 세계로 확장했다”

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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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이윤길 박사학위 논문
해양소설 선구자 작품 세계 고찰
선원들 실증적 서사에 집중하며
대자연과 투쟁하는 인간 그려내

천금성, 그는 ‘살아있는 바다’를 최초로 쓴 한국 해양소설의 개척자였다. 이윤길 제공 천금성, 그는 ‘살아있는 바다’를 최초로 쓴 한국 해양소설의 개척자였다. 이윤길 제공

<해양작가 천금성 연구>라는 한국해양대 박사학위 논문이 생산됐다. 천금성에 대한 조명과 논문조차 별로 없는 외면과 소외의 빈약한 상황에서 최초의 박사 논문이 나왔다는 점과, 해양소설의 시작을 더듬어 그 확장을 전망하는 뜻이 담긴 논문이라는 점에서 각별하다. 천금성을 만나 해양소설을 쓰게 됐다는 이윤길의 학위 논문이다. ‘부산에서 해양소설이 시작됐다’는 점도 문학사적으로 중요한데 요컨대 해양소설 연구는 부산 지역성 탐구의 한 자락으로 읽힌다는 것이다. 천금성에 대한 유일한 단일 논문을 쓴 평론가 한국해양대 구모룡 교수가 지도교수다.

천금성(1941~2016)은 한국 현대 해양소설의 선구자로서 바다처럼 좌충우돌한 문제적 작가였다. 글쓰기에 뜨겁게 매진하면서 도전과 고독, 반항과 방황, 오만과 욕망 따위가 가득 든 ‘삶의 덩어리’를 싸 짊어진 시시포스 같은 작가였다. 그는 좌절하면서 굴러떨어졌으나 바다로 나아갔고 바다, 그리고 육지에서도 비슷하게 굴러떨어졌으나 다시 일어나 ‘썼다’.

초·중·후기로 나눠 작품 세계를 고찰한 논문에 따르면 그는 일본에서 태어났으나 부산에서 컸고, ‘그 주소를 쓸 수 없는 바다’에서 살고자 했다. 한국 최초로 선원들의 실증적 서사에 집중하면서 ‘대자연과 투쟁하는 인간 존재의 경건함’을 그렸다. 그는 경외하는 바다의 깊이처럼 질풍노도에 곧잘 휩쓸렸다. 빛과 그림자가 함께하는 것처럼 그의 삶은 또렷이 대비되는 짙은 명암을 늘 동반하고 있었다. 그게 어쩌면 그의 삶과 펜을 투사한 바다의 생리일 것이었다.

그는 서울대 농대 임학과를 나왔으나 ‘산’으로 가지 않고 반대로 ‘바다’로 갔다. 오사카 귀환동포였던 그의 아버지가 재일본조선인연맹과 관련돼 있어 공직 길이 막혔기 때문이다. ‘호주머니는 텅 비었고, 육지에는 별다른 일이 없었으므로, 차라리 배를 타고 세계의 바다를 다녀오기로 작정했다’는 <모비딕>의 이슈마엘, 뜨내기 같은 신세가 그였다는 것이다. 한국원양어업기술훈련소 어로학과에 들어갔으나 하마터면 배도 타지 못할 뻔했다. 교육 중 데모 주동으로 제적됐으나 우수한 성적 덕으로 출항 직전에 사면되는 곡절을 겪기도 했다.

그의 정열과 정념은 넘쳤고, 노력과 재주, 식견은 뛰어났다. “우선 소재부터 남이 흉내 내지 못하는 별다른 세계, 저 바다라는 엄청난 대자연을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를 써야 옳다는 생각이 든 것이었다.” 그는 1969년 참치 원양어선을 타고 있던 인도양에서 신춘문예에 당선했다. 서울대 출신 2등항해사의 당선 소식을 접한 사주의 특별지시로 1970년 그는 승선 2년 4개월 만에 선장으로 승진했다. 선장으로서 그는 7년여 사투를 벌이며 최고 어획도 올렸으나 대기업 횡포라는 정산금 문제로 회사와 갈등을 빚으면서 1977년 바다에서 쫓겨났다.

해양소설가 천금성에 대한 최초의 박사 논문. 이윤길의 ‘해양작가 천금성 연구'. 이윤길 제공 해양소설가 천금성에 대한 최초의 박사 논문. 이윤길의 ‘해양작가 천금성 연구'. 이윤길 제공

하지만 멜빌 같은 위대한 작가를 꿈꾸며 인도양·대서양 2개 대양을 섭렵한 그는 이미 문단에 주목받고 있었다. 인당수에 맴돌던 한국 해양소설 무대를 세계의 바다로 확 넓혔다, 그의 본격 해양소설에 의해 한국문학은 세계문학으로 격상했다, ‘바다를 체험과 생존의 자리로 받아들인 사람’인 그의 소설을 통해 바다는 ‘살아있는 바다’로서 한국 독자에게 주어진 것이다, 등의 빛나는 찬사를 받았다.

격찬은 가장 위험한 것이고, 그것은 바다 같은 깊이의 삶 속에서 소용돌이로 변할 수 있는 것이었다. 가장 주목받던 그때 그의 추락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1980년 그 험악한 시절에 5공 핵심인 고교·대학 선배 허문도의 제의로, 전두환 전기를 쓰게 돼 평생의 문학적 족쇄를 스스로 찬 꼴이 됐다. ‘더 많은 어획’에 대한 욕망이었는지, 그는 결국 “육지에서 조난했다”는 것이다. 문제의 전기를 쓰고 형편없는 돈(취재비 인세)을 손에 쥐었고, 그 불만을 잠재우려는 5공 뒷배로 문화방송 편집위원이 돼 해양 다큐·드라마를 제작했으나 1987년 낙하산으로 지목돼 사직했다.

10년 대양을 누볐고, 10년 ‘5공 암초’에 스스로 좌초했고, 10년 어용작가로 매도당했던 그였다. 그는 “손바닥, 아니 그의 삶을 관통하고 있는 낚싯바늘을 빼내고” 싶어 했다. 좌초한 그때도 그는 늘 새로운 글쓰기를 하고 있었고, 암 선고를 받은 2012년 직전까지 줄기차게 글을 썼다. 그는 2001년 한국해양문학가협회 초대 회장을 맡기도 했다. “오로지 인간의 굳센 팔뚝과 뜨거운 피로 헤쳐 나가야 하는 가장 험난한 배”를 다시 타기를 바랐던 그는 2016년 첫 원양어선 지남호 출항기념식이 열리던 날, 돌아오지 않을 죽음의 항해를 떠났다. “생텍쥐페리처럼 자신도 바다로 나갔다가 수평선 너머로 영원히 사라지기를 원한다”고 했던 그는 ‘바다’가 되었다. 그가 열었던 길은 김종찬 장세진 이윤길 하동현 김부상 유연희와 고 옥태권 등이 맥을 이어가면서 또렷한 흐름이 되었다.

논문에는 ‘<노인과 바다> 그 몇 가지 오류’(1975), 250장 분량 유고작 중편 ‘아버지의 바다’가 발굴 자료로 게재돼 있다.

천금성에 대한 박사 논문을 쓴 해양소설가 이윤길. 이윤길 제공 천금성에 대한 박사 논문을 쓴 해양소설가 이윤길. 이윤길 제공


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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