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여는 시] 그냥 둔다 / 이성선(1941~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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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의 잡초도

그냥 둔다.

잡초 위에 누운 벌레도

그냥 둔다.

벌레 위에 겹으로 누운

산 능선도

그냥 둔다.

거기 잠시 머물러

무슨 말을 건네고 있는

내 눈길도

그냥 둔다.

-시집 〈절정의 노래〉(1991) 중에서

인위가 멈춘 자리에 ‘무위’가 들어찬다. 무위는 천지 만물을 만들고 변화시키는 힘이자 근원이다. 노자가 말한 우주의 지극한 도(道)다. 무위자연이란 말도 이 무위의 실체와 그 힘의 작동을 자연에서 발견할 수 있기에 붙인 것이다. 시의 ‘그냥 둔다’는 말은 이 무위의 정신을 도드라지게 새겨낸다.

이성선 시인은 ‘마당의 잡초’ ‘잡초 위의 벌레’ ‘벌레 위에 누운 산 능선’, 그것들을 바라보고 있는 ‘내 눈길’도 그냥 그대로 두고자 한다. 이것은 인간도 자연의 일원이므로 무위의 이치에 따라 살아야함을 뜻한다. 무위의 수행, 즉 순리대로 살았을 때 삶은 담백해진다. 담백은 절제와 겸양으로 나타나는데, 이 시에서는 여백의 미로 표출된다. 여백은 보는 사람들에게 여운을 남긴다. 여운은 무엇인가? 그것은 인위로 볼 수 없는 기운생동, 즉 신운(神韻)이다. 이 시는 인간으로서 신의 운치를 훔친 ‘절정의 노래’다. 김경복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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