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모두가 축복받는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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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아 소설가

세상 모든 이에게 축복이 있기를
그 축복은 누구도 비켜 가지 않기를
모두가 인정하는 다수에게
또 한 번 박수 치는 것이 아니라
쉽게 인정받지 못하는 이들을
따뜻하게 감싸 안는 우리가 되기를

마트에 갔다가 ‘보조개 사과’라고 적힌 사과 한 봉지를 사 온 적이 있다. 우박을 맞아 작은 상처가 생긴 사과들에게 이름을 붙여준 것이다. 그 이름을 보면서, 주류에 속하지 않는 존재들에 대해, 그리고 세상이 그 존재를 명명하는 방식에 대해 한참을 생각했다. 물론 매대에 놓여있던 그 사과는 소비되어야 하는 상품이고, 따라서 ‘보조개 사과’라는 예쁜 이름 역시 마케팅 전략에 의한 상업적 네이밍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어떤 존재가 세상에서 규정한 범주로부터 벗어났다는 이유로 배제해 버리지 않고, 혹은 못난이 사과라든지 흠집 사과라든지 그런 식의 부정적인 이름을 갖다 붙이지 않고, 그가 가진 상처에서 보조개를 발견해낸 누군가에게 참으로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정상이라는 말에는 얼마나 많은 차별과 폭력성이 내재해 있는가. 다수라는 이유로, 혹은 사회에서 어떤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정상성을 부여하고, 그 기준에서 벗어나는 대상에 대해서는 비정상이라는 말로 쉽게 규정짓고 배제해 버리는 것. 비하하고 혐오하며 말과 눈빛으로 상처 주는 것. 우리 스스로가 어느 순간 소수자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다수의 편에 서서 무책임한 폭력을 저질러버리는 것.

지금은 그런 단어를 쓰지 않지만,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한부모 가정이나 조손 가정을 일컬어 ‘결손 가정’이라고 명명했었다. 학기 초 제출해야 하는 가정환경조사서를 통해 나는 결손 가정 학생으로 분류되었는데, 그 말은 곧 요주의 인물이라는 뜻이었다. 이 아이의 가정은 정상 가정이 아니고, 따라서 가정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며, 학업 적응력이 떨어지거나 학교에서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다분하므로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는 것. 그러한 분류의 기저에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이라는 의도도 일부 있었겠지만, ‘어느 부분이 없거나 잘못되어서 완전하지 못함’을 뜻하는 ‘결손’이라는 어휘는 어린 나를 어쩐지 주눅 들게 만들었다. 내가 속한 가정은 결손된 가정인가, 잘못된 형태인가, 완전하지 못한가, 비정상인가, 그런 생각을 하면 마음은 외딴섬처럼 고립되었다. 그리고 묻고 싶었다. 정상성을 표방하는 여러분의 가정은 완전합니까, 아름답습니까, 행복합니까.

최근 OTT를 통해 방영되어 인기를 끈 드라마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에서 주인공 다은이 한 말 중에 이런 대사가 있었다. “우리 모두는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에 서 있는 경계인들이다.” 꼭 정신병동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그 말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이분법적 태도로 모든 것을 구분 짓지 않고, 두 개념의 사이를 바라볼 수 있는 세심한 눈으로 경계의 영역을 넓혀 나갈 때 우리는 더 다양한 삶의 방식을 만나고 다채로운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지난 18일, 가톨릭 교황청에서는 동성 커플에 대한 축복을 공식 승인했다. 신의 사랑과 자비를 구하는 데 있어서 인간의 ‘도덕적 분석’이 전제되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표명한 것이다. 정상과 비정상, 도덕과 비도덕, 주류와 비주류, 다수와 소수. 이와 같은 분류는 언제나 뒤바뀔 수 있으며, 이분법적 사고에서 비롯되는 명명은 다분히 폭력적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 선언이 단순히 동성 커플에 대한 언급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 시대의 소수자로 살아가며 수많은 배제와 차별 속에 놓여있는 이들에 대한 따뜻한 위로의 메시지라는 생각을 했다.

입김마저 금세 얼어붙는 이 겨울, 세상 모든 이에게 축복이 있기를. 그 축복은 누구도 비켜 가지 않기를. 모두가 인정하는 다수에게 또 한 번 박수 치는 것이 아니라, 쉽게 인정받지 못하는 이들을 따뜻하게 감싸 안는 우리가 되기를. 우박을 맞고도 붉고 단단하게 잘 여물어 내게로 왔던, 참으로 달디단 보조개 사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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