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공정과 상식,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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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석 문화평론가

영화 ‘올빼미’로 살펴본 사회
보이는 ‘악행’ 외면해 와
상식 저버린 권력자 비판받을 것

보이는 것을 보인다고 하고 보이지 않은 것은 보이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일종의 ‘상식’이다. 사람들마다 각자 볼 수 있는 것이 다르다고 해서 보이는 것을 보이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상식일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는 언젠가부터 그러한 비상식적인 세상을 보고 있었고, 그렇게 세상을 보도록 강요당하고 있었다.

작금의 현실을 우회적으로 진단했던 영화가 있었다. 영화 ‘올빼미’의 주인공은 세상을 볼 수 없는 봉사이다. 인조 시대의 말로는 소경 혹은 맹인이고, 현재 말로 하면 시각 장애인이다. ‘올빼미’의 주인공 천 봉사는 비록 앞을 보지 못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능력을 지닌 의생이기도 했다. 그는 의학적으로 다른 의생이 알지 못하는 병을 볼 수 있었고 그 병을 낫게 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는 인간 그 자체를 보는 데에는 한계를 지녔지만 대신 인간의 문제와 삶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능력을 지닌 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게다가 천 봉사는 다른 사람이 감히 상상할 수 없는 또 하나의 특이한 능력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보이는 것을 보인다고 말하지 않는 능력이다. 그 이상한 능력은 그가 살아남기 위하여 체득한 능력이기도 했다. 특이하게도 천 봉사는 밤에는 볼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지만 하층민인 그는 그 사실을 감춤으로써 자신의 생명과 직업을 보존할 수 있었다.

영화상에서 천 봉사의 등장과 그의 능력이 드러나는 순간은, 보이는 것을 모두 보고 있다고 믿는 지금-여기의 우리들에게 적지 않은 충격을 준다. 지난 2년 동안, 버젓이 알고 있는 사실을 못 본 척 살아야 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이들에게는 더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누가 무엇을 표절하고, 누가 무엇을 변경하고, 누가 무엇을 갈취하고, 누가 무엇을 받았고, 누가 무엇을 꾸몄는지를 버젓이 보고 있으면서도, 우리들은 천 봉사처럼 말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 그리고 그러한 누구를 또 다른 누가 처벌하지 못하도록 막고 있는지를 버젓이 알면서도, 그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애써 숨기는 능력을 키워야 했다. 처벌을 받아야 하는 사람은 여전히 무사한데, 그 사람을 말하는 이는 수모를 겪는 이상한 세상이었기 때문이다. 마냥 그리고 그냥 지켜보는 편이 안전한 세상이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어쩌면 천 봉사의 재능을, 그러니까 보이는 것을 보이지 않는다고 하는 특수한 능력을 이미 본받아 실행하고 있었던 셈이다. 천 봉사처럼 더 좋은 자리와 더 안전한 자신을 위하여, 보고도 보지 않은 척하는 재주를 어느새 터득하고 있었던 셈이다. 생각하면 부끄럽다.

그런데 ‘올빼미’에서 이런 천 봉사도 변하기 시작한다. 그는 자신이 본 것을 더 이상 외면하지 않기로 하면서, 그토록 못 본 척했던 세상을 조금이라도 바꿀 방법을 찾고자 한다. 그 오래된 동기는 자신을 아끼던 이가 죽는 것을 그대로 보고만 있어야 했던 죄책감이었지만, 그 마지막은 세상을 바꾸겠다고 나선 선각자들이 다시 권력에 빌붙어 타협하는 꼴 보기 싫은 세상에 대한 분노였다. 그러니 ‘올빼미’는 공정과 상식이 무너진 세상을 살아야 하는 이들의 분노를 담은 영화였던 것이다. 각자 돌아보면 알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보고도 못 본 척하고 있고, 알아도 왜 분노하지 않고 있는지.

보이는 것을 본다고 하며 보이지 않는 것까지 보려고 하는 것이 ‘공정’이다. 뇌물을 받고도 문제없다고 버젓이 버티는 사람들, 타인의 죄는 먼지까지 찾아내면서도 자기 죄는 대범하게 넘어가는 권력들, 그들을 옹호하다 못해 성역화하는 최고 권력. 그들은 인조의 시대가 어떻게 끝나고 어떻게 비판받는지를 참조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공정과 상식은 야만의 시대가 지나도 여전할 것이고, 최고 권력이 아무리 강성해도 끝내 꺾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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