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로365] 프로크루스테스의 공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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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수 청년정치크루 대표·공모 칼럼니스트

프로크루스테스라는 이름은 몰라도 그의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리스 신화 속 인물인 프로크루스테스는 아테네 인근 케피소스 강변에 사는 악당이다. 여인숙을 운영하는 그는 찾아오는 손님들을 철제 침대에 눕혔다. 그러고 나서 그들을 침대 크기에 맞추어 죽였다. 침대 길이보다 키가 큰 손님은 튀어나온 만큼 머리나 다리를 톱으로 잘라 내고, 키가 작으면 늘여서 죽이는 식이다. 설령 침대에 키가 딱 맞는 손님이 오더라도 죽는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키가 큰 손님에게는 작은 침대를, 키가 작은 손님에게는 큰 침대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자신만의 기준을 강요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그 기준을 상황에 따라 바꾸는 게 더 큰 문제다.

여야 공천 과정 불공정 논란 잇따라

말로만 ‘시스템 공천’ ‘국민 참여 공천’

실제는 ‘낙하산 공천’ ‘고무줄 잣대’

어떤 제도든 권력자의 의중 배제 못해

기만적 명분보다 제대로 된 인물 중요

국민은 심판, 정치는 책임지는 게 선거

총선이 70여 일 앞으로 다가오면서 공천 경쟁도 본격적으로 막을 올렸다. 각 당은 공정함을 자신한다. 국민의힘은 ‘시스템 공천’을 통해 계량화된 지표들로 후보들을 평가함으로써 밀실 공천, 담합 공천을 근절하겠다고 선언했다. 더불어민주당 역시 국민참여공천제를 도입하여 국민이 공천 기준부터 의견을 개진하게 함으로써 국민 눈높이에 부합하는 공천을 하겠다고 밝혔다. 공천의 기준을 명확히 하고 거기에 걸맞은 인물들을 추천하겠다는 약속 자체는 환영한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런 약속들이 제대로 지켜질지는 의문이다. 아니, 의구심을 품는 정도가 아니라 그렇게 되지 않을 거라 본다.

실제로도 약속은 3일을 못 갔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지난 17일 서울시당 신년인사회에서 서울 마포을 출마자로 김경율 비상대책위원을 소개했다. ‘시스템 공천’을 발표한 지 하루 만이다. 갑작스러운 ‘김경율 출마’ 선언에 마포을 당협위원회장인 김성동 전 의원부터가 크게 반발했다. 그 전날에는 인천시당 신년인사회에서 원희룡 전 국토부 장관이 같은 방식으로 소개되면서 윤형선 인천 계양을 당협위원장으로부터 “낙하산 공천”이라는 비판이 불거져 나오기도 했다.

더불어민주당에서는 공직선거후보자 검증위원회의 후보자 적격·부적격 판정을 놓고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그 기준이 고무줄처럼 늘었다 줄었다 했던 까닭에서다. 과거 고문치사 사건에 연루돼 징역을 살았던 정의찬 당대표 특보에게 적격 판정을 내렸다가 이 사실이 알려지고 여론이 악화하자 판정을 뒤집었던 사례가 대표적이다. 보복 운전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던 이경 상근부대변인은 또 어떤가. 그는 검증위원회로부터 부적격 판정을 받았지만 이의 신청을 했고 당 이의신청처리위원회는 이를 ‘기각’이 아닌 ‘계속 심사’ 대상으로 최고위원회에 보고했다. 유독 친이재명계 인사들에게 한없이 자애로운 기준이 적용되는 게 결코 우연은 아닐 것이다.

솔직히 시스템 공천이라는 명목하에 제시되는 각종 기준은 다 기만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제도를 마련하든 권력자의 의중이 배제될 수는 없는 이유에서다. 예컨대 도덕성이나 당 기여도 같은 정성 평가 항목들은 그런 여지를 충분히 남겨 놓는다. 면접이 공정한지도 잘 모르겠다. 2016년 제20대 총선 당시 유승민 의원이 면접을 못 봐서 새누리당 공천을 받지 못한 건 아닐 것이다. 이미 정해진 결과에 명분을 쌓기 위한 허례허식이라면 정책 발표든 심층 면접이든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답을 정해 놓고 짜 맞추는 공천은 프로크루스테스의 행위와 다를 게 없다.

우리는 어떤 제도든 당대표나 지도부의 의사가 반영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100% 공정한 공천 제도는 없다. 사실 당대표와 지도부가 자신들과 손발 맞출 인물을 전략적으로 영입하고 공천하는 게 잘못도 아니다. 진짜 문제는 형편없는 인물을 데려와 물의를 빚거나 이해할 수 없는 공천으로 선거에 참패하더라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는 데 있다. 적어도 옛날에는 당 총재가 전권을 쥐고 공천을 결정했기 때문에 정치적·도의적 책임을 묻는 게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2000년대에 접어들어 총재 권한이 해체되고 당내에 경선이 도입되면서 책임 소재가 불분명해졌다. 많은 이들이 경선은 공정하다고 여긴다. 하지만 그 경선이라는 게 결국 권력자의 선택을 받거나 주류에 편승한 인물에게 열성 당원들의 몰표가 쏟아지는 구조라면 전략공천과 다를 게 없는 거 아닌가. 외려 “당원들이 선택했다”는 이유로 그 결과에 아무도 책임지지 않게 하는 면책사유만 되고 있다.

원칙과 책임이 바로 선다면 시스템 같은 게 없더라도 공천은 권위를 인정받을 것이다. 밀실 공천이면 어떤가. 후보자를 추천한 이유가 타당하다면 밀실 공천이라고 한들 국민의 선택을 받을 것이고, 그저 자기 사람 심을 용도라면 시스템을 거쳤다고 하더라도 국민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어차피 결정은 국민이 한다. 정치는 책임만 잘 지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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