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사과하면 밀린다'는 오해

전창훈 기자 jch@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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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희 여사 '사과하면 총선에 불리' 문자
이명박 전까진 대통령들 사과로 위기 돌파
'사과 실종' 역시 적대·증오 정치의 부산물
윤 대통령 예상 깨는 사과 반전 계기일 수도

김건희 여사가 명품가방 수수 문제를 걱정하는 지인들에게 ‘사과를 하면 야당의 공격을 받아 총선이 불리해질 것’이라는 문자를 보냈다고 한다. 그런 생각이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다. 사과 이후 펼쳐질 상황은 능히 짐작이 된다. 야당은 “뇌물 수수를 인정했으니 이제 수사를 받으라”면서 별개인 도이치모터스 특검법과 함께 총선 전까지 ‘김건희 리스크’를 끊임없이 확대재생산할 것이다. 사과가 되레 야당의 ‘정권심판론’에 불쏘시개가 될 수 있다는 염려를 기우로 치부하긴 어렵다.


‘사과하면 밀린다.’ 김 여사 뿐만 아니라 우리 정치권에 깊이 퍼져있는 신념이다. 사회심리학자인 아론 라자르는 ‘사과에 대하여’란 책에서 “사과 뒤 상황에 대한 공포는 과장된 경우가 훨씬 많다. 수치심은 도덕적 실패가 아닌 고결함의 증거”라고 했지만, 지금 여의도 일대에서 이 말을 믿는 사람은 드물어 보인다. 과거에는 달랐다. 2007년에 이를 분석한 논문이 나왔는데,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은 재임 기간 각각 23차례, 14차례, 18차례나 사과를 했다. ‘양 김’ 모두 아들 문제가 터졌을 땐 직접 국민께 머리를 숙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사과왕’이라 할 만하다. 측근 비리, 인사 실패, 대형 사고 등에서 수시로 사과했고, 2005년 11월 농민 집회 진압 과정에서 사망 사고가 났을 땐 ‘책임 규명이 아직 안 됐다’는 참모들의 만류에도 사과를 강행(?)했다. 이를 대통령직의 엄중함을 잊은 가벼운 처신으로 볼지, 정치적 유불리를 따지지 않는 진솔함으로 볼지는 각자의 판단에 맡긴다.

‘사과 안 하는 대통령’이라는 비판이 언론에 자주 등장한 건 이명박 정부 때부터다. 임기 초반 ‘촛불 시위’ 땐 두 차례나 머리를 숙였던 그는 이후에도 야당의 공세가 거세지자 사과의 빈도를 확 줄였다. 특히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이후 진영 간 메울 수 없는 감정의 골이 여야 정치를 삼킨 이후 사과는 갈등 해결의 수단도, 화해의 다리도 될 수 없는 그저 정쟁의 한 요소로 전락했다.

결정적으로 박근혜 전 대통령의 ‘국정농단’ 당시 사과는 탄핵의 빌미로 작용했다는 인식이 보수 정치권에서 광범위하게 ‘사실’로 인정 받는다. 그래서인지 문재인 대통령은 부동산 폭등을 제외한 대부분의 국정 난맥상에 대한 사과 요구를 수용하지 않았다. ‘조국 사태’ 때에도 조 전 장관에 대한 ‘마음의 빚’을 언급했을 뿐, 나라를 두 쪽으로 가른 잘못은 인정하지 않았다. “잘못한 일은 잘못했다고 말하겠다. 거짓으로 불리한 여론을 덮지 않겠다”는 감동적인 취임사가 무색했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찬찬히 돌이켜보면 사과하면 밀린다는 생각 자체가 근거 없는 오해일 수 있다. 박 전 대통령이 사과하지 않았다면 최순실(현 최서원)의 국정 개입 행태가 묻히고, 탄핵을 피해갈 수 있었을까? 성난 노도와 같았던 당시 여론을 떠올리면 동의하기 힘든 주장일 뿐이다. 조국 사태에도 반성 대신 ‘정치 검찰’ 탓만 하던 전임 정권은 민주화 이후 처음으로 5년 만에 정권을 넘겼다.

윤석열 대통령 역시 ‘사과는 금물’이라는 믿음이 확고해 보인다. 웬만해선 사과하는 법이 없다. 남의 잘못을 단죄하던 검사 출신이라 자기 잘못을 인정하는 걸 수치스럽게 여긴다는 시각이 있을 정도다. 사실 명품가방 문제는 처음 불거졌을 때 “선친과 인연을 내세워 차마 뿌리치지 못했다. 당선인 부인으로서 부주의한 처신이었다”며 재발 방지를 약속했다면, 야당은 몰라도 중도층에서는 ‘저 정도 했으면 좀 지켜보자’는 반응 정도는 나오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나 윤 대통령은 사과 대신 다수 국민의 ‘눈높이’를 언급한 여당 대표의 에두르는 고언도 참아 넘기지 못해 많은 이를 아연케 했다.

적절한 사과에는 △책임 인정 △구체적 표현 △사족 금지 △재발 방지 4가지 요소가 있다고 한다. 명품가방 문제의 해법을 고민 중인 윤 대통령이 늦은 감은 있지만 예상을 깨고 ‘4원칙 사과’를 깔끔하게 하는 건 어떨까? 야당의 공세야 정해진 수순이겠지만, 여론에 맞서려는 오만한 대통령 내외라는 비판 여론을 덜어낸다면 그걸로도 사과의 효용은 충분하지 않겠나.

영화 ‘넘버 3’에서 열혈검사 최민식은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금언을 두고 “죄가 무슨 잘못이 있어, 그걸 저지른 사람이 잘못이지”라고 일갈했다. 사과 역시 그렇다. 고대로부터 갈등을 푸는 열쇠, 진정한 용기로 평가 받는 사과가 유독 여의도 일대에서 ‘악수(惡手)’로 푸대접 받는 건 오염된 우리 정치 문화를 웅변한다. 최근 잇따르는 정치인 테러를 계기로 극에 달한 증오 정치를 성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사인 간에든, 정당 간에든 쌓인 감정의 응어리를 푸는 전제인 사과를 금기시하지 않는 게 하나의 시작점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전창훈 서울정치부장 jch@busan.com


전창훈 기자 jch@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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