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캘리포니아 엑소더스의 교훈

김승일 논설위원 dojun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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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인력 이탈 행렬, 도심엔 노숙자 넘쳐
과밀이 부른 주거·교통난, 탈출 으뜸 원인
수도권 반도체 클러스터·GTX 확장 추진
일극화 폐해 심화해 국가소멸 부추길 뿐

‘California Dreaming.’ 1960년대를 풍미한 마마스앤파파스는 꿈만 같은 미국 캘리포니아의 삶을 노래해 전 세계적인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지금은 일류 기업과 인력이 떠나고 도심은 노숙자로 넘쳐나는 악몽을 겪고 있다. 이른바 캘리포니아 엑소더스(탈출) 현상이다. 미국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으로 꼽혔던 캘리포니아 인구는 2020년부터 내리막길을 걸으면서 초유의 인구 감소 지역으로 전락했다. 글로벌 IT 기업들이 줄줄이 떠나고 인구는 50만 명 이상이 순유출된 상태다. 삶이 팍팍해서 떠나고, 기업 활동에 애로를 느낀 업체들이 앞다퉈 짐을 싼 탓이다. 이런 대규모 유출은 전례가 없던 터라 미국 내에서는 초미의 관심사이자 연구 대상이 되고 있다.

대탈주를 부추기는 건 경제적 요인이다. 그중 으뜸은 주거난이다. 감당하기 어려운 월세를 연체하다 강제 퇴거로 내몰리기 일쑤고, 노숙자로 전락하는 사례도 부지기수다. 물가 앙등, 교통난도 캘리포니아를 등지게 만드는 요인이다. 이 대목에서 언뜻 한국의 상황이 겹쳐진다. 사람과 자원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인 탓에 내부에서 초과밀 경쟁이 발생해 옴짝달싹 못하게 된 곳, 치솟는 아파트 가격에 젊은 세대의 미래가 저당잡히고, 삶의 모든 지표가 바닥을 쳐 ‘국가소멸’의 경종이 울린 곳. 바로 일극화된 한국의 수도권이다. 과밀의 폐해가 공통 키워드로 엮이는 캘리포니아 엑소더스에서 우리는 어떤 교훈을 찾아야 할까?



지난달 25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롱비치에서 세입자들이 '아직 월세가 너무 비싸다' ‘나는 어디서 살아야 하나?’ 등이 적힌 팻말을 들고 임대료 인상 통제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AP 연합뉴스 지난달 25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롱비치에서 세입자들이 '아직 월세가 너무 비싸다' ‘나는 어디서 살아야 하나?’ 등이 적힌 팻말을 들고 임대료 인상 통제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AP 연합뉴스


■ 글로벌 IT 기업도, 인력도 탈주 행렬

테슬라, 휴렛팩커드, 오라클, 찰스슈왑 등은 이미 탈 캘리포니아를 감행했다. 포춘지 선정 글로벌 1000대 기업에 속한 기업 중 10곳 이상이 수년 사이 짐을 쌌다. 100명 이상 규모 기업으로 확대해 보면 60곳 이상이 떠났다. 구글, 애플, 페이스북(메타), 아마존은 캘리포니아 본사를 유지하는 대신 미국 내 다양한 지역으로 사무실과 시설을 확대하고 있다. GDP만 놓고 보면 캘리포니아 경제 규모는 웬만한 국가급으로 일본과 독일 다음인 세계 6위 수준이다. 이러한 거대 경제권에 파열구가 생긴 것이다.

인구는 2020년 3950만 명에서 지난해 3896만으로 54만 명이나 줄었다. 한번 꺾인 인구 추세는 속절없이 추락 중이다. 유권자가 줄자 연방 하원 의석이 53석에서 52석으로 줄어드는 수모까지 겪었다. 캘리포니아 이탈 요인은 과도한 법인세, 고용 규제, 교통난, 도심 노숙자와 범죄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으나 가장 큰 이유는 천정부지로 치솟는 주거 비용이다. 샌디에이고 지역 매체 CBS8에 따르면 침실 한 개짜리 주택의 평균 월세는 2400달러(우리 돈 320만 원)다.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침실 2개짜리 아파트에 월 5000달러(우리 돈 670만 원)가 예사다. 평범한 직장인 가족이 단란하게 살 수준을 한참 넘어서 버리는 것이다.

월세 연체로 인한 강제 퇴거는 사회 문제로 번진 지 오래다. LA타임스는 LA카운티에서 월세가 5% 오르면 2000명이 노숙자로 전락해 거리로 나온다는 연구 결과를 소개했다. 노숙자를 줄이기 위해 행정 당국이 코로나19 기간 퇴거 유예 명령을 내렸지만 지난해 유예가 종료된 뒤 건물주와 세입자 사이에 퇴거를 놓고 소송전 비화, 시위 등 갈등이 잇따르고 있다.


■ 과밀 피해 분산으로 각자도생

스탠포드대와 UCLA처럼 좋은 대학이 즐비하고, 여기서 배출되는 인재들이 실리콘밸리에서 스타트업을 차리고 이들이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한 덕분에 도시에 활력을 주는 성장 모델. 이 선순환이 캘리포니아의 성공 비결이었다. 그런데, 이제 이 성장 모델에 한계가 온 것일까? 대탈주 현상의 근저에는 과밀의 폐해가 있다. 수용할 수준을 넘은 인구가 몰리면서 발생한 혼잡 비용이 너무 커졌다는 거다. 주거난과 교통난이 초래되고 빈부 격차와 범죄율까지 덩달아 악화된 것이다.

지난달 18일 부산 동구 ‘창비 부산’에서 자신의 신간 <도시는 왜 역사를 보존하는가> 북콘서트를 열었던 미국 출신의 로버트 파우저 전 서울대 교수는 “LA 한인들은 미국 중부로 많이 이사 간다. 집값이 너무 비싸서 사람들이 떠나고 있다”(부산일보 2024년 1월 22일 보도)고 전했다. 파우저 교수는 “런던과 도쿄 같은 대도시는 삭막한데, 서울이 그렇게 변해 가고 있다”면서 ‘도시 속 자연과 소통하는’ 매력 때문에 살고 싶은 도시 1순위로 부산을 꼽았다. 주거난, 교통난을 피해 캘리포니아를 떠나 텍사스 등 다른 주로 이주한 이들도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자문해야 한다. 한국 수도권에서도 젊은 세대가 꿈꿀 수도 없는 높은 집값과 교육비 부담에 결혼과 츨산을 포기하고, 최장 3시간 출퇴근과 ‘지옥철’ 등 살인적인 교통난이 흔하다. 캘리포니아를 탈출하게 만드는 상황에 버금간다. 그런데, 왜 캘리포니아 엑소더스처럼 서울 엑소더스, 수도권 엑소더스는 일어나지 않는 걸까?


이종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오른쪽)과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지난달 15일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성균관대 자연과학캠퍼스 반도체관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국민과 함께하는 민생토론회-세 번째, 민생을 살찌우는 반도체 산업'에서 보고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종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오른쪽)과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지난달 15일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성균관대 자연과학캠퍼스 반도체관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국민과 함께하는 민생토론회-세 번째, 민생을 살찌우는 반도체 산업'에서 보고하고 있다. 연합뉴스

■ 다시 수도권 집중 망령

새해 윤석열 대통령은 지방민을 여러 차례 깜짝 놀라게 했다. 윤 대통령은 신년사에서 “저출산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는… 과잉 경쟁을 개선하기… 위해 지방균형발전 정책을 확실하게 추진하겠다”고 다짐해서 큰 기대감을 갖게 했다. 저출생 문제의 본질이 지방소멸을 자양분으로 살찌는 수도권의 과도한 집중에 있다는 대통령의 정확한 진단과 해결책이 반갑게 들렸던 것이다. 하지만, 연이은 수도권 반도체 메가 클러스터, 수도권 광역급행철도(GTX) 확장 계획 발표에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지역균형발전의 포기 선언으로 들렸기 때문이다.

정부 계획대로라면 비수도권 지역 대학에서 반도체를 전공한 인력은 자연스럽게 수도권 클러스터에 취업하는 구조가 된다. 반도체 생산 기업이 수도권에 몰려 있고 지역에는 인력을 받아줄 회사가 없으니 지역 대학이 애써 키운 인재들은 서울과 경기도로 유출될 수밖에 없어서다. 실제 지난해 부산에서 수도권으로 순유출된 1만 1260명 중 20대가 5000명이 넘는다. 해마다 이런 식으로 젊은 세대가 취업을 위해 지역을 떠나니 지방소멸과 수도권 집중의 악순환 고리는 공고화될 뿐이다. GTX 확장 계획은 겉으로 교통 불편 해소를 내세우지만 실은 수도권의 비대화를 더욱 부추기고 지방 고사를 가속화하는 부작용을 낳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노선을 충청과 강원도까지 확대하겠다니, 수도권 블랙홀의 흡입력을 키워 일부 지방까지 준수도권으로 만들 작정이다. 지역균형발전을 다짐하면서 622조 원을 투자해 346만 개 일자리를 만든다는 반도체 클러스터나 134조 원을 들여 GTX를 확장하는 것은 이율배반적이다.

캘리포니아 엑소더스 행렬은 숨막히는 밀집 상태를 벗어나 낮은 주거비 등 쾌적한 생활 환경을 찾아 떠난 거다. 캘리포니아에 남은 사람들도 과밀이 해소되고 그 덕분에 주거난과 교통난에 숨통이 트이면 삶의 질이 개선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집중의 폐해는 분산으로 풀면 된다. 캘리포니아주 정부가 억지로 개입하지 않고도 수요와 공급 불일치 해소 과정에 분산의 지혜가 발휘되는 중이다. 이를 한국식으로 표현하면 지역균형발전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국가 시책으로 수도권 일극화 집중을 부추기는 경로 의존이 반복된다. 윤 대통령 스스로 인구절벽과 국가소멸의 위기 원인이 수도권의 과잉 경쟁이며 해결책이 지역균형발전이라 선언해 놓고도 수도권에 거미줄 교통망을 깔고 기업과 인력을 빨아들이는 반도체 클러스터를 조성하겠다고 한다. 이미 수도권이 과포화되어 지속불가능하다는 진단이 나왔는데 인공호흡기를 달아 생명을 연명하겠다는 것이 아니면 뭔가.

이대로라면 국가소멸의 묵시록은 피할 수 없는 현실로 닥쳐오게 된다. 재앙을 피하려면 서울 엑소더스, 수도권 엑소더스가 필요하다. 수도권 인구가 해마다 지역으로 유출되고, 기업의 탈 수도권 행렬 뉴스가 들릴 때 비로소 한국은 ‘사라지는 국가’로의 진행을 멈추게 될 것이다. 하지만 지금 수도권은 캘리포니아 엑소더스와 정확히 반대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정부가 '교통 분야 3대 혁신 전략'을 공개한 지난달 25일 서울 용산구 서울역 인근 GTX-A 노선 공사장 내부 터널에서 국토교통부가 현장 설명회를 열고 있다. 연합뉴스 정부가 '교통 분야 3대 혁신 전략'을 공개한 지난달 25일 서울 용산구 서울역 인근 GTX-A 노선 공사장 내부 터널에서 국토교통부가 현장 설명회를 열고 있다. 연합뉴스


김승일 논설위원 dojun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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