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급 센 항해사 동생 대신 형이 또 입대 ‘들통’ [해양문학 찾아 떠돈 40년 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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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쌍둥이 군 대리 복무 이야기
1960년대 중반 해기사 몸값 치솟던 시절
일등항해사 동생 월급, 논 한 마지기 값
얼굴 똑같은 형이 월급 나누자며 재입대
예비군 창설 때 발각됐으나 하소연 모면

여객선을 조정하는 조타실의 항해사들 모습. 부산일보 DB 여객선을 조정하는 조타실의 항해사들 모습. 부산일보 DB

병영 문학을 읽다가 어느 병사가 쓴 수필을 보았다. 같은 부대에 쌍둥이 형제가 근무했는데 누가 형이고 누가 동생인지 분간 못해 일어나는 실수와 해프닝을 써놓은 글이었다. 문득 오래전에 있었던 거짓말 같은 사건이 떠올랐다. 어느 바닷가 마을에 붕어빵같이 닮은 일란성 쌍둥이 형제가 있었다. 쌍둥이라고 형님은 쌍곤이, 동생은 또곤이라 불렀다. 농고를 졸업한 형 쌍곤이는 일찍이 해병대에 지원해 군 복무를 마치고 제대해 농사일을 거들고 있었다. 해양고를 나온 동생 또곤이는 대일 화물선을 타고 있었다. 그때는 선원들의 월급도 보잘것없어 일본에서 여자 속옷이나 파라솔, 청바지, 시세이도 화장품 등속을 몇 개씩 가져와 국제시장에 있는 외제 깡통시장에 넘겨 용돈이나 마련하곤 했다.


<한국해기사협회 60년사>에 나와 있는 1968년 성창해운 선박 모습. 당시 해기사들의 월급은 셌다. 한국해기사협회 제공 <한국해기사협회 60년사>에 나와 있는 1968년 성창해운 선박 모습. 당시 해기사들의 월급은 셌다. 한국해기사협회 제공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 국적선은 몇 척밖에 없었고 해기사를 양성하는 해양·수산계 학교도 많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196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선원 수출 길이 열리면서 해기사들의 몸값이 치솟기 시작했다. 잘살아보자고 독일에 광부와 간호사를 보내던 시절이었다. 외국어 잘하고 유능한 선장, 기관장들은 해외 송출선에 취업할 길이 열렸다. 항해사, 기관사들도 마찬가지였다. 해외 수출 길이 열리니 갑자기 해기사 품귀 현상이 생겼다. 그렇다고 부족한 해기사를 하루아침에 양성할 수는 없었다. 그 바람에 해고 출신인 또곤이도 귀하신 몸이 되었다. 예전에는 배를 한 번 내리면 다음 배 승선하기가 어려워 선원과 직원에게 밥이라도 한 끼 사며 인사를 해야 됐는데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연가를 받아 집에서 쉬고 있으면 어떻게 알았는지 이름도 모르는 회사에서 좋은 조건으로 채용하겠다며 자기 회사로 오라는 전보가 여러 통 날아왔다. 인력이 부족하니 진급도 빨라지고 급료도 엄청 오르게 된 것이다. 세상이 이렇게 바뀔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국내 첫 쌍둥이 아기 판다 루이바오와 후이바오 모습. 쌍둥이는 모습이 닮아 여러가지 일들이 벌어지기도 한다. 에버랜드 제공 국내 첫 쌍둥이 아기 판다 루이바오와 후이바오 모습. 쌍둥이는 모습이 닮아 여러가지 일들이 벌어지기도 한다. 에버랜드 제공

또곤이가 수출선 일등항해사가 되었을 때 한 달 급료는 시골에서 논 한 마지기를 살 수 있는 거금이 되었다. 바로 그 무렵에 또곤에게 군에 입대하라는 영장이 나왔다. 또곤이는 고민이 컸지만 병역을 기피할 수는 없었다. 그때 형 쌍곤이가 반농담조로 기발한 제안을 했다. “야, 또곤아, 내가 니 대신에 군대 한 번 더 갔다 올게. 대신에 제대할 때까지 니 월급 반반씩 나누자.” 그때만 해도 시골 면사무소에서는 호적이나 병역에 관한 모든 기록을 펜촉으로 하던 시절이었다. 일란성 쌍둥이인 쌍곤이와 또곤이는 지문만 빼고는 목소리까지 닮았다. 쌍둥이 형제를 나란히 세워 놓고 지문 대조를 하지 않으면 누가 누군지 마누라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대리 복무를 해도 누가 고발하지 않으면 발각될 염려는 없었다. 그리고 그때까지 그런 범법 행위를 한 전례도 없었다.

처음에는 지나가는 농담으로 여겼으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또곤이도 귀가 솔깃했다. 이건 성님 좋고 아우 좋고, 괜찮은 거래다 싶었다, 해병대 병장으로 제대한 쌍둥이 형님이 동생 대신에 육군 이등병으로 다시 한번 입대하겠다는 데 마다할 까닭은 없었다. 또곤이는 군에 안 가고 근 3년 동안 계속해서 배를 타면 선장 진급도 빠르고 그동안 월급으로 논을 수십 마지기나 살 수 있다. 그 논을 반반 나누면 성님도 살기가 편해진다. 남에게 폐를 끼치는 일도 아니다. 법을 어기는 일이긴 하지만 쌍둥이 형제는 죄의식도 느끼지 못했다. 옛날에도 부잣집 아들은 병역 대신 군포를 내거나 종놈을 보내지 않았던가? 뼈 빠지게 농사지어 봐야 손에 들어오는 돈은 몇 푼 안 되는 쌍곤이 동생 또곤의 많은 월급이 아까워서 한 말이지만 농담이 진담이 되고 말았다. 해병대 병장 출신인 쌍곤이 동생 또곤이가 되어 논산 훈련소에 입대하고 또곤이는 수출선 일등항해사로 바다에 나갔다.


향토예비군이 창설되는 바람에 쌍둥이 형제의 대리 복무 속임수가 탄로났다. 사진은 고무신을 신고 훈련받는 초창기 향토예비군 모습. 국가기록원 제공 향토예비군이 창설되는 바람에 쌍둥이 형제의 대리 복무 속임수가 탄로났다. 사진은 고무신을 신고 훈련받는 초창기 향토예비군 모습. 국가기록원 제공

그런데 생각지도 못했던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북한 124군 부대 요원들이 청와대를 깨부수고 박정희 대통령의 목을 따겠다고 내려온 것이다. 그 바람에 향토예비군이 창설되었다. 신병훈련소 훈련을 마치고 육군 이등병으로 복무 중인 쌍곤이 앞으로 예비군 훈련 통지서가 나온 것이다. 세상에는 행운만 계속되는 법이 없다. 부모들에게는 청천벽력이나 다름없었다. 형제끼리 잘살아보겠다고 벌인 일인데 까딱하면 아들 둘이 한꺼번에 범법자가 되어 영창에 끌려가는 꼴을 볼 것만 같았다. -아이구 큰일 났구나. 이 일을 우짜모 좋것노?


1968년 창설 당시 향토예비군 방위 훈련 모습. 국가기록원 제공 1968년 창설 당시 향토예비군 방위 훈련 모습. 국가기록원 제공

비록 못 배운 시골 무지렁이라고 해도 자식 앞에 위기가 닥쳤는데 부모가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고 했다. 인간도 위기에 처하면 앞뒤를 가리지 않고 설치는 법이다. 법에 걸리는 짓을 했다고는 해도 남에게 피해를 준 것도 아니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국가에 대해서도 또곤이가 귀한 달러를 많이 벌어들이니 득이 되었으면 되었지 해를 끼치는 일은 아니다 싶었다. 찾아보면 해결할 방법이 영 없지는 않을 것 같았다. 믿을 만한 사람에게 어쩌면 좋겠느냐고 하소연을 했더니 중대장한테 찾아가 상의해 보라고 귀띔해 주었다. 창설 초기라 시골 예비군 중대장이 그리 대단한 존재도 아니었다. 좁은 시골 바닥이라 수소문해보니 중대장이 영 모르는 남남도 아니었다. 부모들은 중대장 옷자락을 붙잡고 제발 아들 둘을 살려달라고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당시만 해도 시골 인심이 그리 야박하지도 않았다. 예비군 훈련을 대신 해줄 사람만 구하면 어렵지 않게 해결할 수도 있었다. 딱한 사정을 아는 이웃 사람들은 알아도 모르는 척했다.

그렇게 해서 두 아들이 한꺼번에 구속되는 큰 위기는 넘길 수 있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해외 취업자는 출국 신고만 하면 예비군 훈련은 자동으로 면제되었다. 또곤이는 이제 맘 놓고 배를 탈 수 있게 되었다. 군 복무를 형이 대신해 준 덕분에 또곤이는 계속해서 배를 탈 수 있어 진급이 빨라 동기생들보더 먼저 선장이 되어 오래 근무하다 정년퇴직을 했다. 그런 과거를 숨기며 살아온 쌍둥이 형제도 이제 나이가 팔순이 다 되었다. 글/ 김종찬 해양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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