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밤과 '깜깜이'

강병균 논설실장 kbg@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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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 입춘이 지나자 밤이 짧아진 느낌이 확연하다. ‘역사는 밤에 이뤄진다’는 오랜 속설이 있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 보이지 않는 곳, 즉 어두운 데서 결정된다는 의미로 인용되는 말이다. 이를 입증하는 사례는 국내외 역사에 숱하다. 동서양의 시대극에도 사람들이 깜깜한 야밤을 틈타 세상을 뒤바꿀 만한 작당모의를 하거나 목적 달성을 위해 암약하는 장면이 흔히 보인다. 낮에 나오는 중대 사안의 공식 발표는 밤을 거친 형식에 불과할 때가 많다.

1960~80년대 한국 정치는 밤과 함께했다. 당시 밤의 세계를 주름잡은 요정을 이용한 정치가 성행한 게다. 요정은 접대부를 두고 값비싼 요리와 술을 판매한 고급 유흥업소였다. 이곳에서 정치인, 고위 관료, 재벌 기업가가 만나 은밀한 대화를 나누며 밀실정치를 펼쳤다. 이 과정에서 정치적 야합이나 물밑 협상, 밀약, 뒷거래, 정경 유착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은 불문가지다.

이는 밤을 향한 국민의 일반적 시선이 곱지 않은 이유의 하나가 됐을 테다. 그래서일까. 까맣게 어둡고도 부정적인 현상에 ‘어떤 사실에 관해 전혀 모르고 하는 행위’의 뜻을 가진 ‘깜깜이’란 단어를 곧잘 갖다 붙인다. 부동산 용어인 ‘깜깜이 청약’ ‘깜깜이 분양’이 그런 경우다. 코로나19 팬데믹 시절엔 확진자의 감염 원인이나 경로가 불분명하면 ‘깜깜이 환자’ ‘깜깜이 전파’ 등의 표현을 자주 써 시각장애인단체의 반발을 샀다. 각종 선거 직전 며칠간 여론조사 결과 공표가 금지돼 판세를 알기 힘든 안갯속 양상이 전개되는 시기를 ‘깜깜이 기간’이라고도 한다.

이같이 깜깜이 세상이 되거나 어둠이 만연하는 건 악과 부조리가 판칠 수 있고 희망이 없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예나 지금이나 세간에서 밤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바탕으로 깜깜함을 저어하며 밝은 달과 별, 빛, 투명한 것을 예찬하고 동경하는 이유다.

22대 총선이 겨우 두 달 남짓 남도록 선거 룰이 깜깜이 상태로 지속돼 문제가 됐다. 여야 간 선거제 논의가 장기간 겉돌아 국회의원 선출 방식이 결정되지 않고 선거구 획정도 미뤄져서다. 5일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현행 준연동형 비례대표제 유지를 선언하기까진 정치 신인과 유권자들은 난감하기만 했다. 혼란스러운 정치권처럼 우리 경제도 앞을 알 수 없는 ‘깜깜이 터널’에 갇혀 암울한 모습이다. 봄을 앞둔 겨울밤이 점차 짧아지듯이 경제가 하루빨리 저성장 터널을 벗어나게끔 기지개를 켜길 바란다.


강병균 논설실장 kbg@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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