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종갓집 제사

곽명섭 논설위원 kms01@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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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만 있으면 설날이다. 어릴 적 설날을 기다리던 설렘은 지나온 세월에 묻혀 가뭇없이 사라졌지만 그래도 설날은 설날이다. 차례를 지내는 집에선 차례상 음식 준비로 분주하고 시장이나 마트에선 잔뜩 쌓인 제수용품이 설날 분위기를 돋운다. 설 연휴를 맞아 국내외로 여행을 가거나 아니면 차례를 아예 건너뛰는 집들이 늘고는 있다 해도 아직 예전 풍습을 지키고 있는 경우도 많다.

설날이나 추석과 같은 명절에 지내는 차례와 조상이 돌아가신 날 올리는 기제사는 사실 방법과 몇 가지 음식만 다를 뿐 대체로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둘의 구분에 큰 의미를 둘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오히려 차례나 제사를 지내느냐 여부가 요즘에는 더 크게 부각된다. 또 차례나 제사를 지내더라도 그 방식이 예전과 다르게 바뀌고 있다는 점이 더 주목된다. 설날 아침 흩어져 살던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인 자리에서 혹 집안의 제사가 화제가 됐을 때 그 횟수나 시간 등을 놓고 크고 작은 논란이 벌어지는 것도 대개 이 지점이다.

최근 이와 관련한 한 조사 결과가 나왔는데 무척 흥미롭다. 한국국학진흥원이 설날을 앞두고 경북 안동 지역의 종가 40곳을 대상으로 조상 제사의 변화 양상을 조사했는데 우선 제사 시간부터 크게 바뀌었다. 전통적으로 밤 11~12시가 관행이던 제사 시간은 40곳 종가에서 모두 저녁 7~9시로 당겨졌다. 이름만 대면 쉽게 알 수 있는 한국의 쟁쟁한 종가들이 일반인이 흔히 생각하는 고정된 제사 시간에서 탈피하고 있는 셈이다.

제사 시간뿐만 아니라 부부 기제사도 각각 지내던 방식에서 합쳐서 제사하는 합사(合祀) 경향이 뚜렷했다. 40곳 종가 중 약 90%인 35곳이 남편 기일에 부부를 함께 모시고 부인의 제사는 생략하는 방식으로 바꿨다. 많은 제사를 늦은 시간에 지내면서 발생하는 경제·시간적 부담을 줄이기 위한 조치다. 제사 대상도 4대 봉사에서 3대, 2대로 줄인 사례도 11곳에 달했다.

삶의 여건이 바뀌고 젊은 후손들이 늘면서 한국의 내로라하는 종가들도 기존의 전통 제례 방식을 예전 그대로 묵수할 수만은 없는 세상이 된 것이다. 근래 성균관의례정립위원회가 제사상 간소화를 부쩍 강조하고 나선 배경도 이와 맞닿아 있다. 오랜 전통 방식이 점차 사라지는 것은 세월 탓이라고는 해도 언뜻 허우룩하기는 하다. 그러나 새로운 방식이 본래의 의미를 잘 이어갈 수 있다면 이 또한 마다할 일은 아닌 듯싶다.


곽명섭 논설위원 kms01@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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