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철거된 조선인 추도비

임광명 논설위원 kmyim@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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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일본이 조선인에 대하여 크나큰 손해와 고통을 입힌 역사의 사실을 깊이 기억에 새기고 진심으로 반성하여 다시는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표명한다.’

절절한 회개와 다짐의 문구다. 다름 아닌 일본 군마현 다카사키시에 있는 현립공원 ‘군마의 숲’에 있었던 조선인 희생자 추도비 비문의 일부다. ‘있었던’이라고 표현한 건 지금은 없어졌기 때문이다. 군마현의 조선인 추도비는 지난달 31일 전격 철거됐다.

추도비가 있었던 곳은 과거 일본 제국주의 시절 화약공장 자리였다. 당시 일본은 전쟁을 치르면서 화약공장 같은 곳에 조선인들을 대거 동원해 노동을 강요했다. 군마현에서도 6000명 정도가 동원됐고, 그 가운데 수많은 이가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 비극을 극복하고 화해로 나아가자며 일본 시민단체가 중심이 돼 세운 추도비였다. 취지에 공감한 재일본대한민국민단과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도 이념을 초월해 힘을 보탰다.

일본 우익 세력이 그 좋은 뜻을 왜곡하며 공격했다. 조선인 희생자 추도 행사를 정치적 활동으로 규정하고 군마현 정부에 추도비 철거를 요구했다. 집요한 공격에 굴복한 군마현 정부는 당초 2014년 1월까지였던 설치 허가 기한을 연장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군마현 시민들이 불복하는 소송을 제기해 1심에선 이겼지만, 2심에 이어 2022년 최종심에서 패했다. 이후 오랜 실랑이 끝에 추도비는 결국 군마현 정부에 의해 강제 철거됐다. 추도비가 철거되자 일본 우익 세력은 더 기승부렸다. 한 정치인은 “정말 잘됐다”며 “조선인 희생자를 기리는 다른 기념물도 몽땅 철거하자”고 주장했다.

일본 정부가 “지자체 차원의 조치”라며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는 가운데, 북한이 노동신문과 조선중앙통신 등을 통해 6, 7일 이틀에 걸쳐 이례적이라 할 정도로 원색적인 비난을 퍼부었다. “파쇼적 폭거”라거나 “정의와 인륜을 짓밟는 야만적인 행위”라며 “당장 추도비를 복원하라”고 촉구했다. 일본 내 시민단체와 아사히신문 등 일부 언론도 “추도비 철거는 역사에 큰 죄”라며 유감을 표명했다. 그런데, 어찌 된 셈인지 우리 정부는 별다른 말이 없다. 외교부가 “일본 측과 필요한 소통을 계속하고 있다”고 밝힌 게 전부다. 납득하기 어려운 행태다. 무엇이 두려운가. 북한은 해도 우리는 못 할, 국민이 모르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건가.


임광명 논설위원 kmyim@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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